박헌영을 감시한 김일성의 對南공작원 1호 '성시백'
박헌영을 감시한 김일성의 對南공작원 1호 '성시백'
  • 유진
  • 승인 2017.12.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중국공산당 들어가 임시정부 김구와도 인연
김일성 친서로 주은래에 '보내 달라' 요청

 

 

 

(3) 성시백의 등장과 대남공작의 서막

앞서 언급한 대로 김일성은 북조선공산당 조직부 소속의 연락부와 자신의 직속으로 5호실을 만드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 조직을 통해 실제적인 대남공작을 전개하였다.

김일성이 대남공작부서를 창설하면서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하게 추진했던 것이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던 성시백을 대남공작에 끌어들이고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도록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북한의 초기 대남공작은 성시백의 등장과 활동을 얘기하지 않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성시백의 등장은 분명 북한 대남공작의 서막을 여는 전주곡이었다.

그것은 성시백의 활동과 공적에 대해 김일성과 북한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김일성은 1992년 12월 27일 성시백의 세 아들을 만난 자리에서 “앞으로 회고록을 쓸 때 해방 후 남북연석회의 대목에 성시백의 활동내용을 적어놓으려 한다”고 할 정도로 성시백의 공적을 각별히 치하한 바 있다.

그런가하면 북한은 ‘세계 지하혁명 투쟁사에 이름 있는 혁명가들의 위훈담이 수없이 기록되어 있지만 공작내용과 활동범위, 투쟁방식 면에서 볼 때 성시백의 지하공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으며 적들이 성시백을 체포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높이 평가할 정도이다.

◇北, 성시백 공적 기려 영화 '붉은 단풍 잎'과 소설 '역사의 대결' 창작

그리고 북한에서는 김일성ㆍ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북한 역사상 처음으로 성시백의 실제 공작활동 내용을 다룬 영화 ‘붉은 단풍 잎’(8부작)과 장편소설 ‘역사의 대결’1-4부가 창작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김정일은 성세창의 셋째 아들 성자립을 북한 최고의 대학인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및 고등교육상(장관)에 임명한 바 있다. 이는 성시백의 활동에 대해 구체적으로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공적이 그만큼 지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시백과 그가 운영했던 공작 조직이 전개했던 활동을 살펴보면 북한이 광복이후부터 6.25전쟁이 터지기 전까지 대남공작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해왔는지 알 수 있다. 성시백의 활동에 대해서는 관련자들의 증언과 수사기관 기록을 비롯한 당시의 자료들, 1997년 5월 26일자 노동신문과 다음날인 5월 27일 평양방송 발표 내용, 2002년 대남선전매체인 통일여명 편집국 특집보도(181호) 등 북한의 자료들, 전직 북한 대남공작요원들의 진술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공개된 여러 자료들을 종합해 정리하려고 한다.

성시백은 1905년 황해도 평산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중동학교(후에 중동중학교)를 졸업하였다. 3.1운동에서 참가했던 성시백은 박헌영ㆍ조봉암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사회주의청년단체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활동하다가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을 피해 1928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정의감이 강한 성시백이 고향에서 일본인 악질 순사를 죽인 다음 중국으로 망명도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성시백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붉은 단풍 잎'.
성시백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붉은 단풍 잎'.

◇성시백, 중국공산당 들어가 국민당 정보수집 첩보 활동

중국으로 건너간 성시백은 상해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던 중 주은래(중국 초대총리)를 만나 그의 영향 및 주선으로 1930년대 초반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중국공산당원이 된 후 성시백이 중국공산당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신문기자로 위장하고 장개석 국민당 정부가 통치하는 지역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해 보고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중국공산당의 비밀요원, 지하 공작원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는 성시백이 중국 사람이 아니라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성시백은 서안과 상해, 중경 등 장개석 및 국민당 정부가 통치하는 지역 즉 공산당 통치가 미치지 못하는 지역에 들어가 신문기자로 활동하면서 정보를 수집해 중국공산당에 보고하였다. 이 과정에 임시정부 인사들과도 수시로 만나 인맥을 형성하였으며 때로는 임시정부의 활동을 측면으로 지원하는 방법으로 그들의 신뢰를 얻었다.

실제로 성시백은 상해 임시정부가 프랑스 총영사의 지시에 따라 조계지 밖으로 나가야 할 상황에 처했을 때 상해일보에 관련 기사를 게재해 임시정부를 도운 바 있다. 당시 성시백은 ‘프랑스 총영사가 조선 망명자들을 자기들의 불행처럼 여기면서 성심성의로 보호해주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신문에 게재함으로써 프랑스 총영사가 임시정부 인사들을 조계지에서 나가라는 말을 못하게 만든 것이다.

◇성시백, 장개석 정부 관할지역서 중국공산당 위해 공작활동

이를 계기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인사들은 성시백의 소행을 고맙게 생각하게 되었으며 출중한 인물로까지 평가하게 되었다고 한다. 임시정부가 중경에 자리 잡고 있을 때에도 김구 선생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과 가깝게 지냈으며 그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기사를 신문에 게재해 임시정부가 장개석 국민당 정부의 보호와 재정 지원을 받도록 하는데 이바지했다고 한다.

당시 성시백은 김구 선생뿐만 아니라 엄항섭, 장건상, 조완구 등 주요 인사들과 광복국 계통의 송호성, 김홍일, 이범석 등과 친하게 지냈으며 특히 김홍일과는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공산당원으로서 중국 땅에서 중국공산당을 위해 활동하던 성시백이 광복 이후 북조선공산당의 공작원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일부에서는 성시백이 주은래의 서신을 가지고 북한에 스스로 들어가 김일성과 북조선공산당을 위해 일하겠다고 한 것처럼 주장하나 사실 성시백을 대남공작에 끌어들인 사람은 김일성이다.

광복 이후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은 광복 이전부터 관계를 맺고 있던 중국공산당 간부들과의 접촉 및 연락을 취하는 과정에 여러 경로를 통해 성시백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즉 중국에서 장개석과 국민당을 상대로 정보수집 등 활발한 공작활동을 벌이고 있는 능력 있는 중국공산당원이 사실은 중국인이 아니라 조선인이며 그의 이름이 ‘성시백’이라는 정보를 얻게 된 것이다.

당시 38선 이북을 통치하던 김일성으로서는 38선 이남에 있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을 비밀리에 감시하고 각종 정보를 수집할 유능한 공작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박헌영 등 국내파 및 조선공산당과 관련이 없는 인물이 필요했다.

◇김일성, 주은래에게 요청해 성시백 대남공작에 영입

이러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기존부터 긴밀한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주은래에게 인편을 보내 성시백을 넘겨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당시 김일성은 주은래에게 ‘중국혁명도 끝나지 않았지만 조선혁명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당신들이 중국혁명을 위해 싸우는 것처럼 조선인은 조선혁명을 완수해야 한다. 당신 밑에서 공작원으로 활동하는 성시백이 조선인이니 그가 조선혁명을 완수하는데 기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넘겨주기 바란다’고 부탁하였다. 이러한 김일성의 부탁을 주은래가 흔쾌히 받아들여 성시백에게 조선으로 가서 김일성을 도와주라는 지시를 내렸고, 이에 따라 성시백이 김일성에게 넘어온 것이다.

주은래의 승락을 얻어낸 김일성은 곧바로 북조선공산당 조직부 내에 설치되었던 대남부서 고위 간부를 특사로 임명해 성시백이 체류하고 있던 중국 서안으로 급파하였다. 성시백을 찾아가는 특사는 김일성의 친서를 휴대하고 있었다. 중국에서 성시백을 만난 김일성의 특사는 그에게 찾아오게 된 자세한 경위와 과정을 설명하고 휴대하고 간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한 다음 그를 북조선공산당 소속 공작원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그가 김일성을 위해 충성하겠다는 약속도 받아냈다. 그리고 38선 이남지역에 들어가 정보수집 등 공작활동을 전개하라는 김일성의 지시와 함께 구체적인 공작임무도 부여하였다.

이렇게 되어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하였던 성시백이 북조선공산당 소속의 비밀공작원으로 신분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성시백이 1948년 중국에 들어가 중국공산당의 당적(黨籍)을 정리하기 전까지 그는 엄연히 북조선공산당 당원이 아니라 중국공산당 당원이었다.

yj@jayoo.co.kr


더 자유일보 일시 후원

“이 기사가 마음에 들면 후원해주세요”

  • ※ 자유결제는 최대 49만원까지 가능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