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만주족 유적으로 조성해놓은 완파보즈(만발발자) 공원.
중국이 만주족 유적으로 조성해놓은 완파보즈(만발발자) 공원.

고구려가 고조선을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이 중국 당국에 의해 ‘만주족의 역사’로 취급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이영호)은 최근 발간한 연구서 ‘고조선과 고구려의 만남’에서 중국 지린(吉林)성 퉁화(通化)시 만발발자(萬發撥子) 유적을 분석했다. 1956년 발견된 만발발자 유적은 고조선과 고구려 문화층(層) 모습이 한 곳에서 퇴적된 채 발견된 대형 유적이다. 우리나라 학자들이 고고학 자료들을 검토한 결과,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 걸친) 고조선 중심의 네트워크가 고구려를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의 일면을 보여준다.

초기 철기시대에 해당하는 3기·4기 문화층에선 고조선의 물질 문화인 고인돌·세형동검·점토대토기, 고구려 적석총(積石塚, 돌무지무덤)의 원형으로 보이는 무기단석광 적석묘 등이 발굴됐다. 그 위인 5기 문화층은 완전히 고구려 문화다. 박선미 동북아연구재단 연구위원에 따르면 "4기 문화층을 기반으로 한 주민이 5기 문화층을 형성했다고 볼 수 있다. 고구려가 한국사의 최초 국가인 고조선을 계승했다는 것은 한국인들이 수십년간 배워 온 역사다.

학계의 보다 적극적인 연구와 논리 개발이 필요하다. 실제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려되던 바다. 그것이 중화문명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구대륙 가운데 가장 넣은 평원을 가진 중국은 아득한 옛날 ‘중원(中原)’으로 불린 작은 땅에서 시작해 규모를 키워갔다. 꾸준한 영토 확장은 수천년 중국인에게 자연스레 깊이 새겨진 문화적 유전자다. 드넓은 땅을 통치하기 위해 소위 한자(漢字)라는 ‘표의문자’ 체계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고, 이 문자 체계는 비범한 함축성을 통해 대륙에 진입한 무수한 다양성을 집어 삼켰다. 수많은 이민족을 흡수하며 덩치를 키운 게 바로 ‘한족’의 정체다.

한반도에 정착한 우리 조상의 주류는 한족에 흡수된 사람들과 다른 정체성을 유지하며 발전했다. 은나라에서 명명한 기자(箕子)가 고조선을 세웠다는 중국 측 주장의 문제는 은나라를 중국사 취급한다는 것이다. 핵심은 은나라를 간단히 중국사로 간주할 수 있는가다. 한족이라는 정체성이 생기기 1000년전인 은나라는 훗날 중원의 왕조로부터 동이족으로 명명된, 유목·농경을 겸하는 나라였다고 볼만한 합리적 증거들이 존재한다. 하·은·주 3대를 중국의 상고사로 간주하는 것은 2000 여 년전 사마천 ‘사기’ 이래의 통념일 뿐이다.

21세기 들어 중국은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보는 동북공정을 강행해 왔다. 1980년대·1990년대 몇 차례에 걸쳐 만발발자 조사·발굴이 이뤄졌고 1999년 ‘중국 10대 발굴’로 선정됐지만 구체적인 정보는 공개되지 않았다. 유적 발견 60여 년 지난 2019년에서야 발굴보고서가 나왔으며, 마치 중국사인 것처럼 작성됐다. 2016년 이 유적 옆에 개관한 ‘퉁화 장백산민속박물관’은 2017년 퉁화시박물관으로 승격했다. 2018년 만발발자 유적 민속공원도 만들어진다. 광장·민속풍경 거리·호수 등을 마련하고 만주족 문화 일색으로 꾸며 놓았다. 출토 유물을 전시한 퉁화시박물관은 은나라 유민 기자가 예맥의 시조로서 동쪽으로 이주해 기자조선을 세웠다고 설명한다. 한국 학계에선 인정하지 않고 있다.

박선미 위원의 말을 빌면, 중국 정부가 만발발자 유적 일대의 박물관과 공원 설립을 통해 중국 동북지역의 민족에 대한 이른바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의 선전과 역사 대중화를 본격 구현하고 있는 셈이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현재 중국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소수민족의 역사가 모두 중국사라는 관점으로, 고구려를 중국사의 일부로 주장하는 논리로 쓰이고 있다. "고구려 대신 만주족을 내세우는 것은 ‘포스트 동북공정’이 사실상 고구려사를 삭제하는 수순에 들어섰음을 시사한다"고 박 위원은 말했다. 이 방면의 연구를 위한 정책적 뒷받침과 학계의 관심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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