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바이든 대통령이 2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글로벌펀드 제7차 재정공약회의를 마친 뒤 대화를 나누고 있다. /연합

그동안 우리 경제를 압박했던 미국의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반도체와 과학법, 바이오 행정명령 등 각종 경제 현안에 대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으로 기대됐던 한미정상회담이 약식회동으로 끝나면서 국내 산업계의 아쉬움이 커지고 있다.

대통령실은 22일 윤석열 대통령이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을 세 차례 만나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대한 우려를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미국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우리 측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도록 한미 간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바이든 대통령은 "한국 측 우려를 잘 알고 있다"면서 "한미 간 계속해서 진지한 협의를 이어나가자"고 화답했다고 대통령실은 전했다.

하지만 이 같은 일련의 상황이 국내 산업계의 우려를 해소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이로 인해 국내 전기차·배터리·반도체·바이오 업계의 기상도는 잔뜩 흐린 상태다. 미국이 쏟아내고 있는 각종 조치들이 사실상 ‘북미 생산’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기업들은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급하게 생산시설을 구축해야 하는 긴급한 과제를 떠안게 되면서 당초 예정된 국내 투자계획을 축소하거나 철회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생산시설 구축까지는 최소 2~3년이 소요된다. 업계에서는 이번 한미정상회담을 통해 법안 적용 시기가 늦춰져 생산시설이 완공될 것으로 예상되는 2025년까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국내 정치 일정 등을 이유로 뉴욕 체류 기간을 단축하면서 무산된 형국이다.

특히 지난달부터 인플레이션 감축법이 시행되면서 피해를 고스란히 받고 있는 국내 자동차 업계는 울상이다. 당장 7500달러(1000만원)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국내 자동차 업계는 뜻하지 않게 발목이 잡힌 상황이다. 올해 상반기 현대자동차그룹의 미국 내 전기차 판매량은 3만4000대를 기록했다. 테슬라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이 뒤를 포드(2만3000대)와 폴크스바겐(1만7000대), GM(8000대) 등이 바짝 추격하고 있다. 현재 미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현대차그룹의 아이오닉5와 EV6 등 전기차 모델은 모두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어 보조금 혜택을 받지 못한다.현대차그룹이 가격 경쟁력을 상실하면서 2위 자리 마저 위태롭게 됐다.

국내 배터리 업계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앞서 인플레이션 감축법 시행으로 북미 전기차 시장에서 중국산 배터리·부품이 사실상 퇴출 절차를 밟게 되면서 그 공백을 자금력과 기술력을 가진 한국산 배터리가 대체하게 될 수 있다는 기대감도 있었다. 하지만 당장 내년 1월부터 중국산 핵심광물 사용을 줄여야 하는 탓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올해 상반기 기준 우리나라의 수산화리튬·코발트·흑연 등 배터리 핵심광물의 중국 의존도는 90%에 달하는데, 석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다른 공급망을 찾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아울러 1년 전보다 4배 이상 폭등한 리튬 가격도 국내 배터리 업계의 어깨를 더욱 무겁게 하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업체의 근심도 짙어지고 있다. 반도체와 과학법에는 미국 정부의 지원금을 받으면 최소 10년 간 중국에 첨단시설 투자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이른바 ‘가드레일’ 조항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이에 국내 반도체 업계는 미국 내 반도체 생산시설을 구축을 서두르고 있지만, 현재의 기술과 인프라 수준을 고려했을 때 경쟁사 TSMC 수준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소 2~4년 정도의 기간이 소요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지난 12일 미국은 반도체·전기차·배터리에 이어 바이오 분야에서도 국내 생산을 확대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국내 바이오 업계 역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이 자국 내에서 바이오 연구·제조를 사실상 강제하고 나선 만큼 위탁개발생산(CDMO)을 위주로 해오던 국내 바이오 업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유에서다.

더구나 전기차와 배터리, 반도체 업계처럼 삼성바이오로직스·SK바이오사이언스·셀트리온 등 국내 바이오 업체들도 막대한 자금을 들여 미국에 생산공장을 지어야 할 수 있다는 부담을 떠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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