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마지막 독립운동

이승만과 미국무부 계속 대립
소련 간첩 엘저 히스 매개
간첩 득시글한 루스벨트 정부
얄타 밀약설 언론에 터뜨려
포츠담에서 ‘카이로 선언’ 재확인
1944년 미국, 태극기 우표 발행

류석춘
류석춘

1941년 12월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면서 끝났다. 이승만 나이 66부터 70까지 기간이다. 3년 9개월 동안의 전쟁 기간에 이승만만큼 바쁜 사람도 없었을 것이다. 전쟁이 다가옴을 예언한 이승만은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이 패전해 한국 독립의 기회가 올 것을 내다보며, 한편으론 임시정부 승인을 요구하는 외교 선전을 맹렬히 전개했고 다른 한편으론 대일 전쟁 참전을 백방으로 모색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노력은 결국 결실을 보지 못했다. 연합국은 끝내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대일 전(戰) 참전은 한인들 개인 차원에서만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헛발질만 한 셈인가? 그렇지 않다. 이승만의 노력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 그리고 인맥은 ‘열전’과 함께 소리 없이 시작된 ‘냉전’의 전초전이 제공한 엄청난 자산이었다. 전후의 건국은 물론 이어 닥친 6·25 전쟁을 극복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2차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나가던 1945년 2월 흑해 연안 크림반도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루스벨트(가운데), 처칠(오른쪽), 스탈린(왼쪽) 이 만나 전후 세계질서를 논의했다. 동그라미 속 인물이 루즈벨트의 신임을 한 몸에 받던 ‘엘저 히스’다.

대표적인 예를 들어 보자. 전쟁 당시 미국 외교를 담당한 국무부와 이승만은 치열한 싸움을 했다. 이승만은 전쟁 발발 열흘 후인 1941년 12월 17일 국무부를 방문했다. 국무장관 특보 혼벡 (Stanley Hornbeck) 의 주선으로 육군정보국 무어 (Walles Moore) 대령을 만나 중국에서 투쟁하는 광복군 지원을 요청한 다음 날이었다. 17일 혼백을 대신한 히스 (Alger Hiss) 와 면담하며 이승만은 해외한족대회 결의안을 전하고 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했다.

그러나 히스는 ‘임시정부 승인과 한국독립 문제는 중국, 소련, 영국과 협의를 거쳐 미국의 정책이 확정되어야 대답할 수 있다’는 국무부 극동국의 입장을 반복했을 뿐이다 (손세일, 2015, 『이승만과 김구』 제5권, 조선뉴스프레스: 173). 그로부터 2주 후 1942년 1월 2일 이승만은 다시 히스를 찾았다. 히스와 함께 혼벡 사무실로 이동한 이승만은 한국 문제를 두고 심층 토론을 했다.

이 자리에서 히스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이승만의 제안은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미국이 취할 수 있는 조치는 거의 없고, 현 단계에서 한국정부의 독립을 승인하면 북아시아에 큰 이해관계가 있는 소련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는 지적이었다 (손세일, 2015, 제5권: 180). 당시 이승만은 히스가 소련의 간첩이라곤 상상도 못했다. 단지 미국의 동맹국 소련의 입장을 중시하는 맹랑한 젊은이라 생각했을 뿐이다.

이승만은 히스의 입장에 괘념치 않고 오히려 국무부를 상대로 ‘문서투쟁’을 더욱 가열차게 전개했다. 그러나 히스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련의 이익을 위해서 일하던 간첩이었다 (Oliver, 1960, Syngman Rhee: The Man Behind the Myth, Dodd Mead and Company: 175-178; 배진영, 2018, "엘저 히스, 죽는 날까지 매카시즘의 희생자로 행세한 아주 탁월한 스파이" 월간조선 5월호).

엘저 히스가 간첩 사건에서 위증죄로 기소된 사실을 보도한 1948년 12월 16일 New York Times 기사.
1950년 1월 21일 위증죄로 기소된 법정의 앨저 히스.

당시 미국 행정부에는 소련 간첩이 무려 2백여 명이나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손세일, 2015, 제5권: 181). 1933년 출범한 루즈벨트 행정부의 사회주의 뉴딜정책이 이들의 침투 배경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의 막후 실력자였고 같은 해 8월 출범한 국제연합 (UN) 의 산파 노릇을 한 히스뿐만이 아니었다. 국제통화기금 (IMF) 창립의 산파였던 당시 재무 차관보 화이트 (Harry White) 역시 소련 간첩이었다 (조갑제, 2016, "세계사를 바꾼 간첩: IMF 만든 미 재무부 고관 화이트 이야기").

그러나 결의에 찬 이승만은 미 상원 원목인 해리스 (Frederick Harris), 변호사 스태거스 (John Staggers), 언론인 윌리암스 (Jay Jerome Williams) 세 사람으로 하여금 ‘한국상황’ (The Korean Situation) 이란 문건을 작성해 1942년 1월 9일 국무장관 헐 (Cordell Hull) 에게 제출토록 했다. 이 문건은 ‘2300만 한국인의 해방은 루즈벨트 대통령이 천명한 미국의 전쟁목표이며, 미국이 한국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은 회피할 수 없는 도덕적 의무’라는 이승만의 주장을 반영한 문건이었다 (손세일, 2015, 제5권: 183)

이와 같은 이승만의 문서·언론 투쟁은 종전까지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다.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에 관한 이승만의 의혹 제기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벌어진 일이다. 1945년 4월부터 두 달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국제연합 준비회의 참가가 사무총장 히스의 주도로 무산되자 이승만은 언론을 통해 3달 전 얄타에서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루즈벨트와 처칠이 2차대전 종전 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권 안에 두기로 몰래 합의했다"는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터뜨렸다. 한인 사회는 물론 미국의 주류 언론이 발칵 뒤집혔다.

이 밀약이 사실이라면 1943년 11월 카이로 회담에서 루즈벨트·처칠·장개석이 발표한 ‘적절한 절차를 밟아 (in due course)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선언은 국제사기극으로 전락할 판이었다. 물론 ‘적절한 절차가 일정한 기간의 신탁통치를 의미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은 계속 제기되고 있었다. 그러나 한반도가 미국이 아닌 소련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문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문제였다.

이 발언의 근거로 알려진 전향한 공산주의자 구베로 (Emile Gouvereau) 제보의 사실 여부는 이승만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손세일, 2015, 제5권: 597). 이 문제와 관련해 당시 이승만이 가지고 있던 입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있다. 임시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갔던 정한경이 1946년 영어로 출판한 문건 ‘Syngman Rhee: Prophet and Statesman’에 기록된 대목이다.

"그렇게 엄청난 문제를 제기했다가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그 결과가 두렵지 않습니까?"라는 정한경의 질문에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증거가 없소. ... 내가 바라는 것은 얄타협정에 서명한 국가 수뇌들이 그것을 공식으로 부인하는 것이었소" (손세일, 2015, 제5권: 606).

이승만의 도박은 그로부터 두 달 후인 1945년 7월 미국·영국·중국·소련이 직간접으로 참가한 ‘포츠담 선언’에서 일본이 항복하면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재확인하도록 만들었다. 이승만의 문제 제기는 또한 폴란드를 포함한 동구를 해방한 소련이 위성 정권을 세우는 문제에 대해 ‘포츠담 선언’이 우려하는 조항을 넣는 성과도 만들었다.

미국 우정성이 1944년 11월 발행한 5센트짜리 태극기 우표

이승만의 활동은 이에 그치지 않았다. 미국은 2차대전의 피침략국 해방을 상징하기 위해 ‘유린된 나라들’이라는 시리즈로 5센트짜리 우표를 발행했다. 폴란드·체코·노르웨이 등 추축국에 의해 점령당한 유럽의 나라들 시리즈가 먼저 발행되고 이어서 일본 지배하의 ‘아시아 해방’을 상징하는 태극기 우표가 1944년 11월 발행됐다. 한표욱은 이 역시 이승만이 애쓴 결과였다고 증언한다 (손세일, 2015, 제5권: 579).

워싱턴 포토맥 강가의 벚꽂 나무에 관한 일화도 유명하다. 전쟁이 나자 미국인들은 미일 우호의 상징인 포토맥 강가의 ‘일본 벚꽃 나무’를 모두 베어 내려고 했다. 이승만은 벚꽃 나무 원산지가 한국 울릉도라는 일본 백과사전 기록을 찾아 ‘한국 벚꽃 나무’라 바꿔 부르자 제안했다. 논란 끝에 결국 ‘오리엔탈 벚꽃 나무’라 부르기로 결론 났다 (손세일, 2015, 제5권: 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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