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긴 대동강 철교와 자유 향한 평양 시민 대탈출
끊긴 대동강 철교와 자유 향한 평양 시민 대탈출
  • 글 최응표 한국사바로알리기미주본부 대표/ 영역 남신우 북한인권국제연대 대표
  • 승인 2019.12.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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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9주년 특별기획 21]
1950년 12월 4일 수많은 피란민이 파괴된 평양 대동강 철교를 건너 피란길에 오르고 있다. 맥스 데스포씨가 찍은 이 사진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각인돼 왔다. /AP 연합뉴스
 

종군 사진 기자 막스 데스포는 6ㆍ25 전쟁의 대표적 비극을 한 장의 사진에 담아 언론의 노벨상인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바로‘ 대동강 철교의 피란민’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사진입니다. 데스포는 자신의 말대로 그 사진 하나로 퓰리처상의 영예를 누렸지만 그 주인공인 한국 국민의 가슴엔 아직도 그 상처의 아픔이 민족의 고통으로 남아 있습니다.

1950년 12월 4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를 거듭해 대동강까지 쫓겨 왔을 때 대동강 철교는 폭격으로 허리가 끊기고 난간은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었습니다. 유엔군과 같이 후퇴하던 에이피 통신의 데스포 기자는 대동강 철교 위를 건너는 처참한 피란민의 행렬을 발견하고는 15m 높이의 다리 위에 올라가 셔터를 눌렀습니다.

그의 눈에 비친 피란민의 행렬은 자유를 향한 탈출이자 수천 명이 동시에 벌였던 생사의 곡예였습니다. 정말로 추운 날씨였고 그는 손이 곱아 사진을 제대로 찍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적군에 쫓겨 후퇴하는 길이어서 오래 머물 수도 없었습니다. 이때 데스포가 찍은 사진은 단 8장뿐이었고 그 중의 한 장이 바로 퓰리처상을 탄 것입니다.

1999년 한국을 찾은 데스포는 그때의 비참했던 장면을 이렇게 기억했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폭격 맞은 다리 위에 수천 명이 개미떼처럼 기어오르고 수십 명이 떨어져 죽는 등 참상이 연출돼 순간적으로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미국 전함 애리조나는 일본군의 폭탄에 피격 받은 뒤 이틀 동안 불타올랐다. 함선 일부는 나중에 인양되었으나, 나머지 부분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루스벨트 대통령이 일본의 기습 공격을 받은 1941년 12월 7일을 미국 역사의‘ 오랫동안 기억되는 치욕의 날’로 선언하여 그 날에 영원한 생명력을 부여했습니다. 데스포 기자 역시 1950년 12월 4일 폭파된 대동강 다리 위를 개미떼처럼 기어오르며 목숨 건 대탈출을 감행하는 평양 시민의 의지와 열망을 카메라에 담아 그 날에 자유의 가치라는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69년이라는 긴 세월이 흐른 지금, 그때의 물리적 상처는 어느 정도 치유되어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채 역사의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이 마음의 상처는 젊은이들이 6ㆍ25 전쟁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에 따라 우리 역사가 바로 설 때 비로소 치유될 것입니다. 평양 시민들이 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자유를 찾아 떠났는가를 민족의 양심으로 뒤돌아보면 우리가 지금 천국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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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1950년 12월 4일 수많은 피란민이 파괴된 평양 대동강 철교를 건너 피란길에 오르고 있다. 맥스 데스포씨가 찍은 이 사진은 한국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상징으로 각인돼 왔다. /AP 연합뉴스

 

Max Desfor, the AP war photographer, received the Pulitzer Prize for his photograph depicting the representative tragedy of the Korean War. The photo is called the ‘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in Korea’, a well-known photo from the War. Desfor gained fame with this picture, but for the main characters of the photo – the Korean people – the pain from that wound is one that has become the suffering of the people of Korea.

On December 4, 1950, with the entry of the Communist Chinese forces into the war, the South Korean and the U.N. forces that had advanced to the Yalu River, were forced to make a hasty retreat as they were chased down all the way back to the Daedong River.

It was during this retreat that the Daedong River Bridge was bombed and the bridge became a twisted hunk of metal. Desfor, who was evacuating together with the U.N. forces, came to witness the terrible scene of civilian evacuees crossing the wreckage of the bridge, and climbed 15m on top of the bridge and pressed his camera shutter.

The march of the refugees that his eyes laid upon was a march and escape for freedom, and an acrobatic life and death struggle of thousands of people. When Desfor visited Korea in 1999, he recalled the scene from the bridge during the war as follows:

미국 전함 애리조나는 일본군의 폭탄에 피격 받은 뒤 이틀 동안 불타올랐다. 함선 일부는 나중에 인양되었으나, 나머지 부분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사진=위키피디아

“"When I looked back, all of these people were literally crawling through these broken-down girders of the bridge like ants, they were in and out of it, on top, underneath, and just barely escaping the freezing water, with dozens falling to their deaths. I just grabbed my camera and started taking pictures.”

69 years have passed, and though physical damage may have been restored, the pain of the heart has not been healed and has been left forever as a historical pain. This pain of the heart is one that the young generation will understand the correct significance of the Korean War. Through their correct understanding of history, the full healing will happen.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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