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⑭ 1988~1989년 방북 사건의 여파

김대중·이길재, 안기부 조사 받고 '서경원 방북' 불고지죄로 기소
'문익환 목사 밀입북 사건' 후 남북화해 분위기 삽시간에 얼어붙어
정부 '평양학생축전' 참가 불허...임수경, 전대협 대표로 입북 강행

89년 3월 소설가 황석영 씨와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사건이 채 가시기도 전인 5월에 들어서자 동의대 사태가, 이어 전대협 대표인 임수경이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는 방북 사건이 연이어 벌어진다. 여기에 88년에 방북했던 서경원 의원의 방북 사건이 1년이 지난 뒤 알려졌다.

연이은 방북 사건의 여파로 수많은 재야인사와 학생들이 구속되고, 김대중, 이길재 의원이 안기부의 조사를 받고 불고지죄로 기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리에 치르면서 북한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진 노태우 정권에서는 이를 계기로 재야와 학생운동의 통일운동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는 공안통치에 몰입하게 되었다.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1989년 6월 북한에 밀입국해 이적행위를 한 혐의로 당시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서울 중부경찰서에 수감되고 있다.
1989년 6월 북한에 밀입국해 이적행위를 한 혐의로 당시 평민당 소속 국회의원 서경원이 서울 중부경찰서에 수감되고 있다.

평민당 국회의원이자 농민운동가였던 서경원 의원은 88년 8월에 방북하였다. 그가 방북한 사실은 방북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다가 1년 정도 지난 89년에 같은 당의 동료인 이길재 의원에게 털어놓으면서 그 전모가 밝혀졌다. 이로 인해 서경원 의원은 구속되었으며, 평민당의 김대중 총재와 이길재 의원이 불고지죄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서경원 의원은 함평에서 4H 활동을 하고, 가톨릭농민회(가농)에 가입하여 농민운동에 투신하였다. 가톨릭농민회(가농)에서 청년회장과 전국 부회장을 맡았으며 1984년 전국 회장에 선출됐다. 1985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 가입해 1987년 6월 항쟁 당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국본)’ 공동대표로 활동했다.

1988년에는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야농민운동단체 대표로 평화민주당에 영입되어 함평군-영광군 선거구에서 당선된다. 그는 가농 회장으로 있던 1985년에 서독의 성낙영 목사를 통해 북한 당국에 방북 의사를 밝혔는데, 1988년 8월 북한으로부터 방문 허가를 받아 북한 여권으로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프라하에서 평양행 비행기를 타고 8월 19일 평양에 도착했다.

서경원의 방북은 김수환, 장익, 함세웅 등 가톨릭 서울대교구 관계자를 비롯해 소수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경원이 함께 농민운동을 했던 같은 당 이길재 의원에게 자신의 방북 사실을 알리면서 방북 사건의 전모가 드러났다.

이길재는 원내총무 김원기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김원기는 다시 총재 김대중과 안기부장 박세직에게 보고했다. 뒤늦게 방북 사실을 인지한 안기부는 서경원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고, 김대중 총재와 이길재 의원을 불고지죄로 불구속 기소하였다.

황석영 방북 사건

소설가 황석영은 1989년 3월, 조선문학예술총동맹에서 초청을 받아 전국민족예술인총연합(약칭 민예총) 대변인 자격으로 일본과 중국을 경유하여 방북하였다. 88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소련 및 동구권, 중국 등 공산권 국가와의 교류가 본격화되자, 황석영을 포함한 민족문학작가회의도 남북 작가 회담을 추진했으며, 이 과정에서 황석영의 방북이 이뤄진 것이다.

황석영은 방북 전에 안기부와 집권 민정당 사무총장 이종찬 의원에게 북한 방문 계획을 통보했다. 이에 대해 이종찬 의원은 단순히 방북계획을 통보받았을 뿐이며 정부와 협의해서 결정하라고 했다고 해명했다. 이 때문에 이종찬 사무총장이 안기부의 조사를 받기도 했다. 둘의 만남을 주선한 김상현 평민당 원내총무도 안기부 조사를 받았다.

정부에선 북의 대남선전 공세에 말려들 수 있다면서 방북을 반대했는데 황석영 작가가 일방적으로 방북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정권 쪽에서 사전에 계획을 알고 있었지만,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문익환 목사의 방북 사건이 터지면서 이를 문제 삼은 것이다. 이는 황석영 씨가 88년부터 공공연히 ‘평양에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 다닌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황석영은 북쪽과의 문화교류와 남북협력 사업에 합의하였지만, 남쪽에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하겠다는 방침을 세우자 귀국하지 않고 일본과 독일 등을 떠돌아다녔다. 그동안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 대변인 자격으로 4차례 추가 방북하였으며 범민족대회 등의 행사에 관여하였다.

그 후 자신의 방북 당시 경험을 다룬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를 ‘창작과비평’에 연재했으나, 이시영 주간이 ‘국보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이후 창비에서는 황석영의 방문기를 요약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자 귀국해서 구속되었다가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문익환 목사 방북 사건

1989년 방북한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과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1989년 방북한 문익환 목사가 김일성과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민통련의 후신으로 89년 1월 결성된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의 상임고문이었던 문익환 목사가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을 받아 3월 25일부터 4월 3일까지 북한을 방문한 사건이다. 문익환 목사는 통일민주당 당원이었던 유원호, 재일교포 정경모와 함께 개인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두 차례 만나 통일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또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인 허담과 회담을 하고, 4월 2일 인민문화궁전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기자회견에서는 ‘자주적 평화통일과 관련된 원칙적 문제 9개 항’이란 제목의 합의 성명을 발표했다. 합의 성명의 주요 내용은 ①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에 기초한 통일문제 해결, ②정치, 군사회담 진전을 통해 남북의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동시에 다방면의 교류와 접촉 실현, ③연방제 방식의 통일, ④팀스피릿 훈련 반대 등이었다.

문익환 목사는 북경을 통해 돌아왔는데, 정부와 사전협의 없이 독자적으로 방북했으며 평양 도착성명에서 ‘존경하는 김일성 주석’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한국 정부를 비방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상 ‘반국가단체잠입죄’로 구속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공안합동수사본부’를 구성해 전민련의 주요 간부를 연행해 조사하고, 시인 고은과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장이었던 이재오를 구속했다. 전민련 조국통일위원회 위원들은 조사를 받았다. 문익환 목사는 지령 수수와 잠입, 탈출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7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3년 3월 6일 사면되었다.

임수경 방북사건

1989년 8월 15일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이 판문점 북쪽지역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오고 있다.
1989년 8월 15일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했던 임수경이 판문점 북쪽지역에서 군사분계선을 넘어 돌아오고 있다.

한국외대 용인캠퍼스 불어과에 재학중이던 임수경이 1989년 6월 30일부터 8월 15일까지 한 달 보름간 전대협 대표 자격으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을 방문한 사건이다. 임수경 양의 방북 사건은 국내는 물론, 북한 내에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다.

북한은 88서울올림픽에 대응하기 위해 89년 7월 1일부터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을 개최하기로 하였다. 이에 북한은 ‘조선학생위원회’ 명의로 전대협 앞으로 초청장을 보냈다. 초청장은 조선학생위원회에서 북한적십자사를 거쳐 대한적십자사에 전달되었고, 다시 통일부를 거쳐 전대협에 전달되었다.

북한의 초청장이 전대협에 전달된 것은 88서울올림픽 공동개최와 세계적인 탈냉전 분위기로 인해 남북 사이에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익환 목사와 서경원 의원의 무단 방북이 사건화되기 전이었기에 가능했다. 정부는 7.7선언을 통해 조건 없는 남북대화를 제안했고, 한국일보는 <대학생들 평양축전 보낸다>란 우호적 기사(2월 12일)를 내보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는 문익환 목사의 밀입북 사건이 벌어지면서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문익환 목사의 방북 후 공안정국이 조성되면서 정부가 학생들의 평양축전 참가 투쟁을 억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문교부는 ‘평양축전’이 북한의 반미와 반한 선전장이라는 이유를 들어 전대협의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참가를 공식적으로 불허했다(6월 6일).

이에 전대협은 임수경을 대표로 선발하고 밀입북 루트를 탐색했다. 일단 문익환 목사가 경유했던 서울-홍콩-북경-평양은 불가능했기에, 일본-서독-동독(베를린)-소비에트 연방을 통한 우회로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6월 21일, 집에서 출발한 임수경은 일본에서 7일간 머무른 뒤 서베를린-동베를린-모스크바를 거쳐 9일만인 30일에 평양에 도착하였다.

평양에 도착한 임수경은 ‘전대협은 마침내 평양에 도착했습니다’라는 도착 성명서를 발표했다. 임수경이 북한에 발을 들이기 전날 한양대에서는 5천여 명의 학생이 모여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임종석 의장과 전문환 ‘평축준비위원장’이 임수경을 평양에 파견했다고 발표하였다. 이에 경찰은 전의경 병력을 한양대로 투입하여 2천여 명의 대학생을 강제 연행하였다.

임수경은 7월 3일 내외신 기자회견을 열어 ‘전대협이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했으며, 7월 7일, 북한 조선학생위원장 김창룡과 함께 ‘남북청년학생 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그녀는 북한에 온 동기를 "조국 통일에 대한 열망" 때문이라고 했으며, "남과 북은 민족 대단결의 원칙에서 통일되어야 하며 미국은 한국 내 문제에서 손을 떼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수경의 방북은 남북 양쪽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국은 수많은 밀입북 사건에 이어 대학생마저 북한에 들어간 것이 충격이었고, 북한은 임수경 특유의 ‘나대는 성격’과 ‘발랄함’으로 문화적 충격을 받은 것이다. 생기발랄한 임수경의 모습에 북한 주민들도 평소와 다르게 자발적으로 몰려들어, 북한 당국이 진땀을 흘려야 했다.

당시를 기억하는 탈북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임수경은 북한에서 인기 정상의 아이돌과 같았다고 한다. 임수경의 패션(티셔츠와 청바지)도 신선했을 뿐 아니라, 거침없는 발언과 행동은 북한의 청년들에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임수경이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 ‘전대협 진군가’는 북한에서 유행하기까지 했다.

45일간의 방북을 마친 임수경은 8월 15일 귀환을 위해 동행하겠다고 방북한 문규현 바오로 신부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서 귀환했다. 원래 계획은 7월 27일에 도착하는 것이었는데, 판문점 귀환이 군사정전위 협정 위반으로 불허되어 6일간 단식 투쟁을 통해 허락을 얻어냈다. 귀환 후에는 안기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구속되었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