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호가 만난 사람] 혈액암 투병 배우 안성기

“출연작 중도 포기 병마보다 큰 고통...차기작 기대와 희망 나누고 싶다
배우는 관객에 연기로 봉사·헌신...감동·기쁨 나눌 작품 만나게 기도
격리돼 적막한 공간에서 치료 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 필요해”

투병 중인 배우 안성기.
투병 중인 배우 안성기.

지난 15일 배창호 감독 데뷔 40주년 특별전 개막식이 열렸다. 이날 개막식에는 그를 아는 여러 동료, 선후배들이 참석했다. 그 가운데 70-80년대 배창호 감독의 영화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사람, 배우 안성기 모습도 보였다. 이후 대중의 관심은 온통 안성기에 쏠렸다. 푸근한 인상 하회탈 같은 웃음에 다부진 체격, 당장이라도 영화현장에 뛰어갈 것 같은 배우, 최근 영화 ‘한산:용의 출현’에서도 단단한 모습을 보였던 그였다. 그런데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이유를 묻는 기자들에게 안성기는 혈액암 투병 중임을 밝혔다. 대중에게는 그 모습이 무척 낯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에게는 달라진 대로 달라진 것 없는 안성기였다. 그 자체로 늘 시간을 함께 하며 밥도 먹고 얘기도 하고 바둑도 뒀다. 안성기의 배우 이력에 대해서는 많이들 알 터, 이 자리에서는 독자들을 대신해 근황에 관한 궁금증을 풀어본다.

- 투병 소식이 전해진 뒤 다들 우려하고 있다. 언제 증세가 나타났는가?

"2년 전이다. 한남동 동네에 있는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고 욕탕에 들어가면서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다행히 가까이 있던 분이 신고해 구급차로 후송됐고 응급실에서 깨어났다. 몇 군데 큰 병원을 거쳐 그 분야에 저명한 의사를 만나 꾸준히 치료를 받아왔다."

- 언젠가 치료 중인 강남 성모병원에 1억 원을 기부한 뉴스를 보았다.

"혈액내과 조석구 박사가 주치의인데 일단 위기를 넘기고 난 뒤 주변의 불우한 환자들이 친구처럼 다가왔다. 같은 처지의 환자로 치료비가 부족한 분들에게 써주기를 바라면서 작은 정성을 보태고 싶었다."

- 아플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이웃 환자였던 것 같은데, 그 다음은?

"영화다. 아무리 내일 어떻게 된다 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은 연기다. 출연 중인 작품을 중도에 포기한다는 것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심리적으로 볼 때 나에게는 병마의 시련보다 더 큰 고통이다."

지난 15일 서울 압구정동 CGV에서 개막된 배창호 감독 특별전에 참석한 배우 안성기(사진 가운데). 이날 그의 투병 사실이 알려지며 팬들의 응원 메시지가 이어졌다. 이날 함께 영화계 인사들. (뒷줄 왼쪽부터) 영화 ‘한산’의 김한민 감독, 배창호 감독, (앞줄 왼쪽부터) ‘꼬방동네사람들’ 이철용 작가 부부, 배우 안성기, 배우 김희라, 영화평론가 김종원, 배우 김수연. /사진=인터뷰365
지난 15일 서울 압구정동 CGV에서 개막된 배창호 감독 특별전에 참석한 배우 안성기(사진 가운데). 이날 그의 투병 사실이 알려지며 팬들의 응원 메시지가 이어졌다. 이날 함께 영화계 인사들. (뒷줄 왼쪽부터) 영화 ‘한산’의 김한민 감독, 배창호 감독, (앞줄 왼쪽부터) ‘꼬방동네사람들’ 이철용 작가 부부, 배우 안성기, 배우 김희라, 영화평론가 김종원, 배우 김수연. /사진=인터뷰365

- 가족들의 충격도 컸을 것이다.

"미국에 사는 큰아들 다빈이는 코로나 사태로 움직일 수 없었고, 아내(조각가 오소영)와 둘째 필립이 힘들었을 것이다."

- 투병 중 가장 견디기 힘든 점은?

"먹는 음식이 지극히 제한됐다. 우선 물을 많이 마시지 않고 살았는데 물을 많이 마셔야 하는 것은 고문과도 같았다. 여기에 먹고 싶은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도 힘든 시련이었다. 신체 활동에 제약이 되는 의사의 행동 규제 요청도 많았다. 그리고 무균실에서 격리되어 혼자 적막한 공간에서 치료를 받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인내가 필요하다."

- 최근 영화 ‘한산:용의 출현’이 성공했다. 모처럼의 대박이었다.

"기분 좋았다. 최근에 느낀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고 기쁨이었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사이,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설립자이며 원로배우인 신영균 회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안성기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신영균 회장은 안성기에게 "기운 내야 해, 힘내야지. 정신이 제일 중요해. 마음이 약해지만 병을 못 이겨요. 힘내요! 우리 안성기"라고 크게 말했다. 곁에 있는 필자에게까지 들리도록 힘주어 격려했다.)

- 1950년대 김지미 배우와 데뷔 동기다. 아역 시절부터 출연한 작품이 아마 300여 편은 될 것 같다.

"그 정도는 안 되고 200여 편쯤 된다."

- 1980년 이장호 감독의 ‘바람불어 좋은 날’로 활동을 재개를 했을 때부터 기자로서 가까이 지켜봤다. 한번 물어보고 싶은 질문인데 못한 것 같다. ‘고래사냥’ ‘투캅스’ ‘깊고 푸른 밤’을 비롯해 최초 1천만 관객 영화 ‘실미도’ 등 그 많은 작품 중 어느 영화가 가장 애정이 가고 잊을 수 없나?

(그는 오래 깊이 생각하다가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이준익 감독과 함께 한 ‘라디오스타’를 잊을 수 없다."

- 이유는?

"자그마한 이야깃거리를 의미 있고 즐겁고 신명나게 풀어간 작품이었다. 나는 우울한 캐릭터보다 밝고 희망적이고 재미있는 역할이나 배역이 마음에 들고 늘 하고 싶다."

- 그러고 보니 ‘라디오스타’에서 공연한 박중훈 배우와는 참 오랜 콤비로, 파트너로 많은 작품을 성공시켰다. 그 중에 ‘투캅스’는 백미 같다. 두 사람이 형님, 아우 하며 평생 정답게 의리를 나누며 사는 모습을 보면 흐뭇하다. 또 누구와 깊은 정을 나누는가?

지난해 제11회 아름다운예술인상에 참석한 안성기. 그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왼족부터 가수 조용필, 필자 그리고 안성기. 조용필과 안성기는 중학교 동창이다.
지난해 제11회 아름다운예술인상에 참석한 안성기. 그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 이사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왼족부터 가수 조용필, 필자 그리고 안성기. 조용필과 안성기는 중학교 동창이다.

"선후배들이 다들 날 좋아하고 나도 다 좋아해서 몇 사람 꼽기가 좀 거북하다. 그냥 만만한 사람이라면 박중훈을 비롯해 김수철·정우성·이정재 등이다. 김수철은 ‘고래사냥’ 때 노래보다 연기가 너무 힘들다고 안 보이는 곳에서 자주 울먹울먹해 내가 달래가면서 함께 연기했다."

- 힘들 때 부모님(아버지는 배우 출신으로 영화사 사장을 역임한 고(故) 안화영 씨다) 생각도 많이 날 것 같다.

"물론이다. 어머니는 83세 때 돌아가셨고 아버지도 94세까지 사셨다. 인간은 좋을 때는 잊고 살다가 힘들어지면 부모님을 생각하지 않나. 내가 60대 때는 아직도 갈 길이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했는데 칠순을 맞이하면서 인생이 너무 짧구나, 남은 시간이 길지 않게 보이는 불안감이 다가왔다."

- 지금 안성기 배우 모습을 보고 불안해하는 영화인과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다음 작품을 기대해 달라는 희망사항을 함께 나누고 싶다. 배우는 관객을 위해 연기로 봉사하고 헌신하는 직업인이다. 영화를 통해 사랑을 주셨으니 영화로 은혜를 갚고 보답하는 길밖에 없다. 사랑하는 관객들에게 감동을 드릴 수 있고 즐거움을 나눌 수 있는 작품을 만났으면 하고 기도한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교 신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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