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상모
연상모

중국공산당이 올해 11월에 개최된 6중 전회에서 채택한 3차 ‘역사결의’에서, 1981년 2차 역사결의 당시 담겼던 ‘개인숭배 금지’와 ‘집단 지도’라는 표현이 사라졌다. 이는 시진핑 국가주석의 장기집권의 길을 연 것으로 해석된다. 40년 전 2차 역사결의 때 덩샤오핑은 1976년 사망 때까지 27년간 종신 집권한 마오쩌둥에 대한 반성으로 "지도자의 종신제를 폐지하고 그 어떤 형태의 개인숭배도 금지한다"고 명문화한 바 있다.

2012년 공산당 총서기로 집권한 시진핑이 이렇게 자신을 중심으로 한 권력집중을 추진하는 것은 과거 마오쩌둥의 모방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시가 마오를 모방하는 것은 국내 정치 및 경제, 대외정책에서 모두 나타나고 있으며, 금번 시론에서는 우선 국내 정치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시의 마오 모방 상황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1949년 중국 공산당정권 수립 이후 마오쩌둥 시대(1949-1976년)와 덩샤오핑 시대(1978-2012년)를 비교할 필요가 있다. 마오의 시대는 ‘신중국’ 수립 이후 소위 마오쩌둥식의 사회주의 추진 시기였고, 덩의 시대는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발전을 일군 시기였다. 마오와 덩은 중국을 사회주의국가로 만든다는 최종목표를 공유했으나, 그 과정에서 방법은 달랐다.

마오와 덩은 통치형태에서 차이를 보였다. 마오는 1930년대 중반의 대장정에서부터 국민당에 승리하는 1949년까지 전략적 판단이 정확했다. 하지만 1949년 이후 그의 판단은 그가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만 토의되었고, 지도자들 간의 정책토론은 룰이 깨지고 다른 지도자들은 그의 의견만을 따르는 경향이 있었다. 공산당 내에서 그의 지위는 제국의 황제와 같았다. 그는 1949년 이후 자신의 오만에 빠져서 중국의 현실 상황을 완전히 무시했다. 백화제방운동,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을 통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 했고, 대량의 인명피해와 부작용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다. 정치적인 적들을 다루는 데 있어 무자비하게 대했다. 그의 존재가 너무 강해서, 그의 생전에 후계자 승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덩은 마오와 같은 독재자가 출현하여 국가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집단지도체제’를 제도화하고 국가주석 임기를 10년으로 제한했다. 덩은 개인적 숭배를 포기하고 질서정연한 승계절차를 마련했다. 그리고 1989년 천안문사태 이후 자신이 계획했던 은퇴를 실행했다. 덩은 중요한 직책을 맡지 않았다. 1997년 사망 시에는 이미 은둔자가 되어 있었다.

한편, 시는 집단지도체제를 무력화하고 권력집중을 강화시켜 마오에 버금가는 힘을 갖게 되었다. ‘위대한 영수 마오쩌둥’을 연상시키는 ‘인민의 영수 시진핑’ 용어가 등장했고, 헌법의 국가주석 연임 제한 규정을 삭제했다. 그리고 현재 중국 내에서는 시의 장기집권을 위한 움직임이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다. 중국 내에서도 비판을 부를 정도의 개인숭배 조짐이 나타나고 언론 통제와 검열이 강화되었다. 시는 부패청산을 이유로 정적들을 대규모로 제거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선진 기술이 일반 국민의 발전을 위해 쓰이는 게 아니라 소수 권력자의 대중 통제를 위한 도구로 쓰이고 있으며, 이는 ‘디지털 독재’로 불리고 있다. 시진핑의 지도력 구사는 거대한 사회통제이다.

하지만 마오와 시의 행태는 차이점이 있다. 시는 마오의 카리스마가 없다. 마오는 자신의 권력을 직접 만들어냈는데, 시는 중국 정치파벌의 타협의 산물로 그 자리에 올랐다. 시는 과격한 마오를 모방하지만, 마오가 가졌던 카리스마와 전략적 유연성이 결여되고 ‘경직성’이 지배한다. 그 결과 중국을 국내정치와 대외정책에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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