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이승만 시대(8) 루즈벨트 만나고...민영환 자결에 사흘 울다
[연재]이승만 시대(8) 루즈벨트 만나고...민영환 자결에 사흘 울다
  • 이주영(李柱郢) 교수
  • 승인 2019.1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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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호개방’ 정책의 존 헤이 국무장관을 면담

저자 이주영(李柱郢): 
건국대 명예교수. 뉴데일리 이승만 연구소 공동대표.
1942 평북 용천 출생. 인천중-제물포고 졸업
서울대-서강대-하와이대 사학과 수학
프린스턴대-콜럼비아대 사학과에서 연구
역사학회-한국 아메리카학회 회장 역임
건국대 사학과 교수, 부총장, 대학원장 역임
주요저서: 미국의 좌파와 우파/ 미국사/ 미국현대사의 흐름/ 빼앗긴 서양문명의 역사/ 빼앗긴 우리역사 되찾기/ 한국현대사 이해/ 우남 이승만 그는 누구인가

목록으로 돌아가기2019.07.16 21:04  

 

[연재]이승만 시대(8) 루즈벨트 만나고...민영환 자결에 사흘 울다

‘문호개방’ 정책의 존 헤이 국무장관을 면담

이승만이 탄 대륙횡단 열차는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싼타페를 거쳐 시카고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동부로 가는 기차를 바꾸어 타고, 1904년 12월 31일 밤 워싱턴 역에 도착했다. 남은 돈은 몇 달러뿐이었다. 싸구려 호텔에서 자고 다음 날, 이승만은 워싱턴의 아이오와 서클에 있는 주미대한제국 공사관을 찾았다. 공사관에는 이미 서울의 민영환으로부터 이승만을 도우라는 편지가 도착해 있었다.  

이승만은 하원 의원인 휴 딘스모어를 찾았다. 그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과 아는 사이였다. 딘스모어 의원은 존 헤이 국무장관과의 면담 주선을 약속했다. 

존 헤이 국무장관은 문호개방(門戶開放)정책을 내세워 열강의 중국 분할을 막아 낸 것으로 유명해진 인물이었다. 면담 날짜를 기다리면서 이승만은 1905년 1월 15일 <워싱턴 포스트>지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일본이 조선 왕국을 침략하고 있음을 폭로했다. 그의 영어는 미국 신문기자들을 상대할 정도로 능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존 헤이 국무장관이 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면담은 1905년 2월 20일에 가서야 겨우 이루어졌다. 그날 이승만은 딘스모어 의원과 함께 국무장관실에서 존 헤이와 30분 이상 만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던 존 헤이 국무장관은 한국 선교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승만은 그의 문호개방 원칙을 한국에도 적용해 독립을 보존해 주도록 요청했고, 존 헤이는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기쁨에 찬 이승만은 본국의 민영환과 한규설 앞으로 자세한 면담 보고서를 보냈다. 딘스모어 하원의원도 이승만의 보고서 사본을 서울 주재 미국 공사에게 보냈다. 그러나 일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얼마 안 있어 존 헤이 장관이 병으로 사망했기 때문이다.

시어도 루즈벨트 대통령과의 짧은 면담

러-일 전쟁을 마무리 짓기 위한 포츠머스 회담이 열리기 한 달 전인 1905년 6월, 미 육군장관 윌리엄 태프트가 하와이에 잠시 들렀다. 그는 친선 사절단을 이끌고 동양 순방을 떠나는 길이었다. 일행 가운데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과 사위도 있었다.  

하와이 교민들은 한인들의 독립 보존 의지를 태프트에게 전달할 좋은 기회로 생각하고 윤병구 목사의 주도로 대대적인 환영 집회를 열었다. 그리고는 1882년의 한-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 조항에 따라 미국이 대한제국의 독립을 지켜주기 위해 개입해줄 것을 요청하는 4천명 하와이 교민의 청원서를  전달했다. 하와이 감리교 선교회의 존 와드먼 목사는 한인 대표인 이승만과 윤병구가 미국 대통령을 만날 수 있도록 태프트 장관의 소개장을 얻어냈다.

윤병구 목사는 그 소개장과 한인들의 청원서를 가지고 이승만이 기다리고 있는 워싱턴으로 갔다. 두 사람은 필라델피아로 가서 서재필과 함께 청원서를 다듬었다. 그때 시어도 루스벨트 대통령은 여름휴가를 보내기 위해 뉴욕 시 동쪽 롱아일런드 오이스터 베이에 있는 별장 사가모 힐에 가 있었다. 그래서 1905년 8월 4일 두 사람은 기차를 타고 뉴욕을 거쳐 그 곳으로 갔다.

그리고는 대통령 비서에게 청원서와 소개장을 전달했다. 회답이 오래 걸릴지 모른다는 비서의 말에 풀이 죽어 호텔로 돌아왔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날 저녁 대통령 측으로부터 다음날 아침 9시 정각에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기뻐하는 두 사람을 미국인 기자들이 호텔로 찾아와 축하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은 외교관 정장을 빌려 입고 사가모 힐에 도착했다. 그들이 막 접견실로 안내되었을 때, 밖에는 포츠머스 회담에 참석할 러시아 대표단의 위테 백작 일행이 마차를 타고 도착하고 있었다. 대통령은 우선 러시아 대표단을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이승만과 윤병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인들의 청원서를 훑어보고 나서는, 그것을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미 국무부에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대통령의 친절에 감동한 두 사람은 흥분과 희망에 들떠 호텔로 돌아왔다. 두 사람은 기자들에게 에워싸여 축하를 받았다.

워싱턴의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가기 위해 두 사람은 서둘러 기차역으로 갔다. 흥분한 나머지 숙박료로 20달러의 큰돈을 내고 거스름 돈도 잊었기 때문에 호텔 직원이 돌려주기 위해 기차역까지 쫓아오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역만리서 충정공 민영환의 죽음을 슬퍼하다

두 사람은 뉴욕을 거쳐 다음 날 이른 아침 워싱턴에 도착했다. <워싱턴 포스트>지에 자신들에 관한 기사가 난 것을 보면서 힘이 솟았다.  두 사람은 아침 식사를 하자 마자 서둘러 대한제국 공사관으로 갔다. 

그러나 공사 김윤정의 태도는 놀라울 정도로 차가왔다. 그는 서울로부터 훈령을 받지 않는 이상 그 청원서를 미 국무부에 보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어느 사이 그는 대한제국의 멸망을 예상하고 이미 일본 공사관과 내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두 사람은 정오까지 그를 붙들고 설득했다. 그들은 다음날 아침에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김윤정은 문도 열지 않은 채, 당장 떠나지 않으면 경찰을 부르겠다고 위협했다. 그리고 다시 찾아오면 쫓아버리라고 흑인 경비원에게 명령했다. 낙담한 두 사람은 문 밖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러는 사이에 대한제국은 일본이 강요한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잃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런지 얼마 지난 1905년 9월 10일 이승만은 서울의 민영환으로부터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편지와 함께 활동비 300 달러를 받았다. 그리고 나서 두 달 후인 11월에 민영환이 일본의 만행에 분개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승만은 사흘 동안을 울었다. 

주미공사 김윤정은 일본에 대한 협조 대가로 나중에 전라북도 지사와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는 영광을 얻었다. 그러나 분노한 교민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몰래 귀국해야 했다. 그러다가 대한제국은 1910년 8월 29일에 일본에 강제로 합병되었다.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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