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퇴하면서도 승리한 장진호 전투
후퇴하면서도 승리한 장진호 전투
  • 글 최응표 한국사바로알리기미주본부 대표/ 영역 남신우 북한인권국제연대 대표
  • 승인 2019.1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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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69주년 특별기획 22편]
장진호 전투 미해병대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전혀 다른 형태의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국적이 다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산군이 전통적인 의미의 정규전을 벌였다면 마오쩌뚱의 중공군은 유격전이라는 형태의 전투 방식을 구사하지 않았을 겁니다.

유격전이 뭐냐구요? 네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적이 앞으로 나오면 우리는 물러난다. 적이 머물면 우리는 어지럽힌다. 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친다. 적이 물러나면 우리는 쫓아간다.’ 서로 맞서 한 바탕 겨루는 것이 아닌 이 전투 방식에 국군과 유엔군은 골탕을 먹습니다.

병력의 수가 많은 이유도 있지만 이 때문에 국군과 연합군은 밀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군은 몇 년 후에도 이런 전술을 구사하는 군대와 또 만나게 됩니다. 바로 베트남에서 호치민의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의 베트콩들이었습니다.

장진호전투는 미 제1해병사단이 중공군 제9병단 예하 7개 사단 규모가 포위한 장진호 계곡을 벗어나기 위해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 2주간에 걸쳐 전개한 철수 작전입니다. 철수 작전이 왜 이렇게 유명하고 중요하냐고요?

◇장진호 전투로 중공군 함흥진출 2주 지연

장진호 전투 중공군 나팔수가 돌격나팔을 불고 있다.

이 전투로 중공군의 함흥 진출이 2주일간이나 지연됨으로써 동북 지방으로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 부대 들이 흥남으로 집결할 수 있는 시간을 얻게 되었으며 곧 이어 시작된 흥남 철수 작전도 가능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중공군 제9병단은 이때의 피해로 중공군 3차 공세에 참여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중공군의 3차 공세는 수원 일대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의 기틀을 마련하여 이후의 전장에서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미군 해병 제1사단이 장진호에서 몰살당했다면 전황은 걷잡을 수 없이 유엔군에 불리해졌을 것이고 한반도는 다시 공산군에 점령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장진호에서 12만 중공군에게 포위된 2주간은 미 제 1해병사단에게는 지옥이었습니다. 중공군의 피리 소리와 나팔 소리가 마치 미군을 향한 장송곡처럼 울려 퍼진 장진호 일대는 매일 매일이 영하 20도에서 30도를 넘나드는 혹한이었고, 미군들 사이에서는“ 비기기 위해 죽어야 하나”라는 냉소적인 말이 유행어처럼 번질 정도였습니다.

중공군

10배가 넘는 중공군이 포위한‘ 죽음의 계곡’을 뚫고 살아나와 미 제1해병사단의 전통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전우의 시신과 부상병을 적진에 남겨두지 않고 싣고 온다는 전통과 명예를 지켜낸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사단장인 올리버 스미스 장군이 남긴 명언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뉴욕 헤럴드 트리분의 마가릿 히긴스 기자가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스미스 장군에게“ 지금 후퇴하는 겁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장군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후퇴라니? 말도 안 돼! 우리는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고 있는 거라고!” 그렇습니다. 장진호 전투는 철수인 동시에 공격인 전투였습니다. 후퇴가 아니라 공격이라는 말은 사람을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바꾸어 놓습니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이 죽음의 2주간 미군 병사들을 격려한 힘이 되었던 것입니다.

장진호 전투에서 미 해병은 사상자 3.637명, 비전투 사상자 3.657 명의 인명 피해를 보았고 중공군은 전사자 2만 5천 명, 부상자 1만 2천 5백 명이라는 엄청난 인명 피해를 입었습니다. 저주에 가까우리만큼 잔인하고 비참한 전투였습니다. 미 해병 1개 중대가 전부 얼어 죽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장진호 전투는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함께 세계 3대 동계 전투로 꼽히는 기록적인 전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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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판]

사진설명1950년 겨울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에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들이 추위를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진 출처 = 초신퓨(Chosin Few) 홈페이지]
사진설명1950년 겨울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 벌어진 장진호 전투에서 미군에 포로로 붙잡힌 중공군들이 추위를 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진 출처 = 초신퓨(Chosin Few) 홈페이지]

With the entry of the Communist Chinese forces into the Korean War, the South Korean and U.N. forces had to resort to carrying out an entirely different kind of war. The Battle of Chosin (Changjin) Reservoir was a retreat operation that took place for two weeks between November 27th to December 11, 1950, by the U.S. 1st Marine Division as they were breaking out of the Chosin Reservoir area while surrounded by the 9th Army of the Chinese Communist People’s Volunteer Army(PVA).

Why has a retreat operation become so famous and important? Through this battle, the Chinese Communist army’s advance to Heungnam Port was delayed for two weeks, which earned time for the South Korean and the U.N. forces that had advanced to the northeast area of the Peninsula to gather at Heungnam Port, and which led to the successful evacuation via Heungnam Port.

Because the Communist Chinese PVA 9th Army was badly mauled by its attempt to enter Heungnam, they were unable to join the Chinese force’s third offensive and thus the Chinese army stopped only at Suwon. On the other side, the South Korean and the U.N. forces were provided an opportunity for a counterattack, and in later battlefields, they were able to hold on to the initiative.

In other words, if the US 1st Marine Division was decimated at Chosin Reservoir, the progress of the war would have been uncontrollably unfavorable to the U.N. forces, and the entire Peninsula would have been overrun by the Communists. It was pure hell for the U.S. 1st Marine Division as they were surrounded by 120,000 Chinese communist forces around Chosin Reservoir.

장진호 부근 산악에서 미군의 중공군 방어. 1950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초순까지 수십일동안 혹한의 산야에서 오로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중공군과 대치하였다. (Credit)
장진호 부근 산악에서 미군의 중공군 방어. 1950년 11월 하순부터 12월 초순까지 수십일동안 혹한의 산야에서 오로지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중공군과 대치하였다. (Credit)

The noise of the Chinese force’s pipes and trumpet sounds rang out like funeral music for the American forces, and they had to suffer in minus 20 to 30 degree weather, and the American Marines joked cynically that ‘to die for a tie.’

Even though the Marines were surrounded by an enemy Chinese force 10 times their size, how were they able to break through the encirclement at the Chosin Reservoir, and carry on the 1st Marine Division’s tradition an honor of never leaving behind their dead and wounded?

We can find the clue in something that Major General Oliver P. Smith, Commander of the 1st Division said. The New York Herald Tribune reporter, Marguerite Higgins Hall, asked Maj. Gen. Smith as he was retreating and breaking out of the Chinese encirclement, “Are you retreating right now?”, and Maj. Gen. Smith snapped back:

“"Retreat, hell no! We're not retreating, we're just advancing in a different direction.” So yes, 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 was both a retreat and an attacking operation. Attacking, instead of retreating, changes the mindset of a soldier from being passive to being active.

This kind of thinking was what gave strength to the American troops during the two hellish weeks. In 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 the U.S. Marines suffered 3,637 casualties, and 3,657 non-battle related casualties. The Chinese Communist forces suffered 25,000 killed in action, and 12,500 wounded – a tremendous suffering and number of casualties.

It was a cursed battle of violence and tragedy. There was the tragedy of a squadron of Marines that froze to death. Along with the Battle of Moscow and the Battle of Stalingrad, the Battle of Chosin Reservoir is considered the third most significant cold-weather battle in history.

jayooilbo@jay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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