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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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하면 넘어갈 일이다." MBC 보도로 불거진 대통령의 발언 논란에 대해 민주당을 비롯한 좌파 인사들은 일제히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예컨대 홍기원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건 사적으로 정말 내밀하게 한 얘기이기 때문에 이걸 가지고 외교적으로 문제 삼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요. 다만 ‘윤석열 대통령이 저런 성격의 소유자구나. 그런 말을 했었구나’ 하는 정도로 넘어가는 것이죠." 평소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모든 것을 부정하던 최민희는 광우병 당시 MB가 사과함으로써 그 국면을 넘어갔고, 그 이후 지지율이 40%까지 올랐다고 말한다. 이런 주장이 그럴듯하게 들리는지, 국민의힘 인사들마저 동조한다. 김용태의 말이다. "대통령께서 유감을 표명하시고, 또 이런 것을 국민들께 이해를 구하셨으면 이렇게까지 여야가 정쟁으로 가지 않았죠."

하지만 사과가 늘 아름답게 끝나는 건 아니다. 예를 들어보자. 의사가 수술했는데 환자가 사망했다. 의사의 과실이 있건 없건 환자가 죽는 건 안타까운 일, 그래서 의사는 유가족에게 사과한다. ‘제가 못나서 환자분을 살리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 경우 유가족이 ‘아닙니다. 선생님은 최선을 다했습니다’라며 인사하는 훈훈한 광경이 펼쳐질 것 같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사과한 의사는 유가족이 의료소송을 냈다는 통지서를 받는다. 더 기가 막힌 건 의사의 사과가 법정에서 의사의 잘못을 시인하는 용도로 쓰인다는 점이다. 물론 의사의 사과 한 마디에 마음을 푸는 유족들이 대부분이지만, 그 사과를 빌미로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는 유족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의사는 일이 터지면 숨어 버리고, 유족들은 ‘사람이 죽었는데 왜 의사는 사과 한마디 없느냐?’며 격분하는 장면이 연출되곤 한다. 지금 좌파들이 한 목소리로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건 어떤 목적일까. 그 사과를 듣고 ‘아, 그럴 수 있다’며 넘어가기 위함일까, 아니면 그걸 빌미로 정치적 이득을 챙기기 위함일까.

이명박 정권 시절 광우병 시위를 복기해 보자. 미국산 소고기로 광우병이 발생할 확률은 0.000000001%도 안 됐지만, 좌파들은 ‘뇌송송 구멍탁’ ‘미국산 쇠고기 먹느니 청산가리 털어넣겠다’라는 자극적인 문구로 무장한 채 광화문 광장을 메웠다. 시위 한 달 반이 지난 5월 22일, MB는 사과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최민희의 말처럼 이 사과로 시위가 잦아들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시위는 더 커졌고, 그들의 구호도 ‘미국소 수입 반대’에서 ‘의료민영화’ ‘한반도 대운하’ ‘언론탄압’ 등으로 확대됐다. ‘이명박 OUT’이란 피켓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6월 19일 MB가 "뼈저린 반성"이 담긴 2차 사과를 했지만, 시위는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고, 오히려 정권퇴진 투쟁으로 번졌다. 6월 23일 기사제목은 다음과 같았다. "주말 촛불 다시 폭력으로 변질." 사과를 통해 광우병 국면을 넘겼다는 최민희의 말은 거짓말이었다. 사정이 이런데도 윤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해야 사태가 수습된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다음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거짓말쟁이거나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하이에나가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다 킬리만자로까지 가는 것처럼, 좌파들은 윤대통령을 까기 위해 화성까지도 갈 인간들이다. 유엔총회 이전에 간 영국 여왕 조문까지 ‘외교참사’로 증폭시킨 게 바로 좌파들이지 않은가. 이번에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에 대해 사과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유추해 보자. 1) 윤대통령이 ‘이XX’을 한 건 이제 팩트가 된다. 2) 윤대통령은 욕이나 하는 품격없는 인간이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다. 3) 탄핵시위가 들불처럼 일어난다.

그렇게 본다면 사과를 거부한 윤대통령의 대처는 현명했다. 사과는 법무장관 후보자 가족이 표창장을 위조하거나, 자기 당 대선후보가 법인카드 유용 등의 범죄를 저질렀을 때, 그리고 방송사가 자막을 조작하고 이메일을 보내 한미관계를 훼손하려 했을 때 하는 것이지, 홍기원 말마따나 잘 들리지도 않는, "사적으로 내밀하게 한 얘기"에 하는 건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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