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배재학당 시절

배재학당 입학 후 반년만에 영어 교사로 발탁
1년 3개월만에 배재학당 졸업식서 영어 연설

류석춘
류석춘

21살의 유생(儒生) 이승만이 1896년 4월 문을 두드린 배재학당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었다. 이승만 스스로 한 말이다. "내가 배재학당에 가기로 한 것은 영어를 배우려는 큰 야심 때문이었고, 그래서 나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나는 영어보다도 더 귀중한 것을 배웠는데, 그것은 정치적인 ‘자유’이다." (이정식, 2005,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배재대 출판부, p. 310).

‘배재학당’은 1885년 8월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가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교육기관이다. 이보다 6개월 전 즉 같은 해 2월 고종은 한국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세우고 미국인 의사이자 선교사인 알렌(Allen)에게 서양 의술을 펼치고 가르치도록 했다.

한 해 뒤 1886년엔 역시 미국인 선교사이자 의사인 스크랜튼(Scranton) 여사가 ‘이화학당’을 세웠고, 또 다른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는 ‘경신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다시 이듬해 1887년에는 또 다른 미국인 선교사 벙커(Bunker)가 ‘정신여학교’를 세웠다. 이들 미국인 선교사들은 당시 자신들이 세운 여러 학교에서 서로 돌아가며 품앗이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 대목에서 궁금히 여겨야 할 질문이 하나 등장한다. 기독교 전파를 금지한 조선에서 이들 미국인 선교사들은 어떻게 갑자기 정부의 허락을 얻어 이렇게 많은 학교를 잇달아 세울 수 있었는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는 다음 두 가지 사건을 이어서 보아야 한다. 가깝게는 1884년 12월 ‘3일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멀게는 1882년 5월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이다.

김옥균 등 개화파는 우정국(우체국) 낙성식 행사를 빌미로 민씨 집안으로 대표되는 수구파를 상대로 한 쿠데타 즉 무력정변을 일으켰다. 개화파 자객의 칼이 당시 실력자 민영익을 난자(亂刺)했다. 마침 현장에 있던 독일공사 묄렌도르프가 민영익을 자신의 집으로 급히 옮기고, 미국 공사 푸트에게 의료지원을 요청했다. 푸트는 알렌을 급파했다. 알렌은 죽음 직전의 민영익을 3개월 동안 정성껏 치료해 마침내 살렸다. 고종은 감동했다.

다른 한편 고종은 1882년 5월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인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그로부터 1년 후 1883년 5월 한성에 부임한 미국 공사 푸트를 맞았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대미 친선사절단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했다. 이런 상황에서 갑신정변으로 목숨을 잃을 뻔한 왕비 집안 실력자 민영익을 미국인 의사 알렌이 살려낸 것이다.

개인 알렌에게는 물론 미국이라는 나라에 고종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 선교를 금지한 당시의 상황을 우회하는 방법으로 미국인 선교사들은 조선에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자 애쓰던 때였다. 시의적절한 알렌의 활약으로 그 이듬해인 1885년부터 미국인 의사가 세운 병원이 섰고 또한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우후죽순으로 들어설 수 있었던 까닭이다.

이로부터 대략 10년 후 1894년 ‘갑오개혁’이 시행되면서 미국인 선교사들은 서울을 넘어 평양을 비롯한 전국 방방곡곡에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1894년 한 해에만 평양에 광성학교, 숭덕학교, 정의여학교 등이 세워졌다. 이후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는 전국으로 확산됐다. 1910년 조선이 완전히 망할 때까지 이들이 세운 학교는 전국적으로 9백여 개에 이르렀다.

이승만이 배재학당에 입학한 1896년은 바로 이런 시절이었다. 이미 창립된 지 11년이나 된 배재학당은 미국인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 가운데서도 가장 잘 나가는 학교였다. 이승만이 입학하기 10년 전인 1886년 고종이 친필 현판을 내릴 만큼 배재학당은 명성을 누렸다.

이런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은 단연 두각을 나타냈다. 입학한 지 6개월 만에 학당의 영어 강사로 발탁됐다. 또한 아펜젤러, 노블, 에비슨 등 여러 선교사들을 통해 미국의 역사와 독립투쟁, 자유와 민권, 선거와 민주주의, 사법제도, 국민과 인권 등을 배우고 깨달았다. 이승만은 그 참에 상투도 잘라 버렸다.

입학한 지 1년 3개월만인 1897년 7월 22살의 이승만은 정동감리교회당에서 열린 졸업식에서 대표로 연설을 했다. 왕실의 명사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물론 선교사들이 모두 모인 자리였다. 당시 정국의 현안인 ‘조선의 독립’ (The Independence of Corea) 에 관한 연설이 영어로 장내에 퍼졌다. 아쉽게도 연설 원고가 전해지지 않고 있지만, 이승만의 연설은 하객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서재필은 독립신문에 이날 일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의 연설은 창의적이다. 조선과 중국 관계, 위태로운 현 상황과 독립과제의 논의를 전개한 거침없는 말에 관객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 뜻이 훌륭하고 영어도 알아듣기 쉽게 하였다고 외국인들이 매우 칭찬하더라. 윤치호씨도 ‘조선의 독립’이란 연설이 매우 좋았다고 일기에 적었다고 하더라."

아펜젤러는 그가 발간하는 영문 월간지 ‘코리안 리포지터리’ (Korean Repository) 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미숙한 이 졸업생 대표는 ‘조선의 독립’을 연설 제목으로 택했다. 이것은 조선에서 처음 거행되는 대학(College) 졸업식 연설의 주제로 매우 적절하다. 독립만이 이들 젊은이들이 교육받은 것을 실천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줄 것이다. 이승만의 어법은 훌륭했고 감정도 대담하게 표현했으며 발음도 깨끗하고 명확했다."

다른 한편, 배재학당에서는 갑신정변의 실패로 해외로 도피해 의사가 되어 귀국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라는 학생회 토론모임이 조직됐다. 이승만은 이 모임을 이끌면서 소식지 ‘협성회회보’를 1898년 1월 1일 주간신문으로 창간했다. 이어서 같은 해 4월 9일에는 일간지 ‘매일신문’ 그리고 8월 10일에는 역시 일간지 ‘제국신문’을 각각 창간하고 논설을 썼다. 서재필·윤치호 등이 주도해 1896년 7월 결성한 ‘독립협회’ 일도 맡았다. 독립협회가 주관하는 거리집회 ‘만민공동회’의 대의원으로도 활약했다.

‘협성회회보’ 창간호에 23살 이승만이 쓴 논설은 당시 그가 무엇에 관심을 가졌는지 분명히 보여준다. "무릇 사람이 젊은 나이에 뜻을 굳게 세워 학문을 닦는 것은 나중에 그 학문을 기반으로 공사(公私) 간에 큰 과업을 성취코자 함이라. 오늘날 구미 제국은 정진하고 있다. 이런 때에 만일 우리가 과거의 학문에만 힘을 쏟아 옛사람들 이야기만 공부하고 과거의 일만 배워서 과업을 수행코자 하면 이는 곧 나무를 거꾸로 심고서 자라기를 바라는 것과 마찬가지니 어리석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은 언론을 통해 ‘신학문을 배워 구미 제국을 따라잡아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시간을 달리기 시작했다.

1896년 건축 중인 배재학당 모습.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아펜젤러다. (김낙환, 2014, 『아펜젤러 행전』 청미디어, p. 162)
1896년 건축 중인 배재학당 모습.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아펜젤러다. (김낙환, 2014, 『아펜젤러 행전』 청미디어, p.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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