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전 국민은 통일하자"

1945년 10월 17일 기자회견
총독부와 협의한 여운형의 건준을
박헌영이 접수해 공산당 천지로
‘인공’,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
남한 해방한 미군은 정책 못 정해
한민당 우파 조직은 동아리 수준
이승만, 통일전선 위해 ‘독촉’ 결성

류석춘
류석춘

1945년 10월 16일 오후 4시 김포공항에 도착한 이승만은 다음 날 오전 10시 미군정청에서 하지 중장의 안내로 귀국 후 처음 보도진을 만났다. 그는 영어로 먼저 말하고 이어서 한글로 스스로 통역하는 순차적 발언 방식의 기자회견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요지의 발언을 했다 (1945년 10월 17일 매일신보 1면 머리기사 "전 국민은 통일하자").

"세계 각국 사람들이 지금 우리에게서 알고자 하는 일은 40년 동안 남의 나라의 압박과 천대를 받아 오던 조선 민족이 과연 자기들끼리 능히 자주독립 국가를 세워나갈 수 있나 없나 하는 그것이다. 그런데 내가 조선에 와서 미국 사람들(군정청 간부들)을 대해보니 그들이 염원하는 바는 조선 민족이 어서 빨리 한 덩어리가 되어 주기를 바라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여기 와 있는 미국 사람들은 모두 하루라도 빨리 자기 나라로 돌아가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해 38선 이남을 해방한 미군이 1945년 9월 9일 오후 4:30 서울의 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며 경례하고 있다.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해 38선 이남을 해방한 미군이 1945년 9월 9일 오후 4:30 서울의 총독부 건물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리며 경례하고 있다.

귀국 후 딱 하루 밤을 지낸 이승만의 발언이지만, 이 발언에는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부터 당시까지 펼쳐진 그리고 이후 펼쳐질 정국의 흐름에 대처하는 이승만의 입장과 소신이 명확히 반영되어 있다. ‘전 국민은 통일하자’ 즉 ‘한 덩어리가 되자’ 다시 말해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강조하는 이승만에게는 이미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과제를 둘러싸고 38선 이남의 분열은 물론 38선 이북과의 대결 또한 분명하게 그려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총독부의 은밀한 후원으로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띄운 여운형은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자체적으로 정부를 조직하고자 했다. 박헌영의 손아귀에 들어간 건준은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55명의 상임위원(국회의원)을 선임했다. 9월 14일에는 이승만을 주석으로 한 내각을 발표하고 인민공화국(인공) 수립을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건준이 관리·감독하던 치안 및 행정기관을 인공이 인수한다고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건준은 입장을 바꿨다. 조선총독부 경찰을 인수하는 대신 건준은 YMCA 유도사범 등을 통해 지역별로 치안대를 조직하고 또한 체육 교사 등을 동원해 학도대를 조직했다. 한편 일제에 근무하던 조선인 경찰은 해방을 맞아 조선경찰대를 자체적으로 조직했다. 다른 한편 말단 경찰은 경찰보안대를 역시 자체적으로 조직했다. 따라서 경찰은 총독부 경찰, 건준 경위대, 조선경찰대, 순사들 모임인 경찰보안대 등으로 분열 및 난립해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이영석, 2018 『건국전쟁』 조갑제닷컴, pp. 29-30).

동시에 민간인 치안단체도 우후죽순으로 난립했다. 이들은 무장을 위해 경찰관서 습격은 물론 일본인 건물, 사무실, 공장, 신문사 등을 접수했고 심지어는 일본군 군수창고도 탈취했다. 대표적인 예가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 화신백화점 맞은편의 해군 무관부 군수창고를 접수한 사건이다. 이를 본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에게 위촉했던 행정권 이양을 취소했다 (이영석 2018: 31).

마침내 9월 8일 인천에 상륙한 미군은 9일 오후 4시 30분 서울의 총독부 건물에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렸다. 이어서 미군은 9월 12일 하지의 포고령을 통해 ‘정당이나 단체가 치안이나 행정업무에 나서거나 간섭하는 것을 금한다’고 발표했다. 인공은 미군정에 저항하며 ‘인민공화국은 13개 도, 25개 시, 175개 군에 인민위원회 조직을 마쳤다’면서 이듬해 3월 총선거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미군정은 인공의 정부 참칭을 문제 삼기는 했지만, 해산을 위한 적극적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정책을 확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미군이 한반도에 상륙할 무렵인 9월 초 미국은 소련과 협의해 단시일 내에 4대국 신탁통치 체제를 만들고 미군은 철수한다는 계획을 채택했다. 소련 간첩이 우글거리는 미 국무부가 소련과 합의하는 신탁통치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지에 부임한 하지는 신탁통치 계획을 수정해 남한에 자유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국무부에 건의했고, 이승만의 귀국을 주선했다.

이승만의 귀국을 맞이한 조선공산당 박헌영은 ‘우리 인민공화국의 주석 이승만 박사가 귀국하셨다. 그는 민중이 존경하고 우러러보는 분, 전국은 환호에 넘치고 있다. 위대한 지도자에게 충심의 감사와 만강의 환영을 바친다’며 아부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10월 20일 오전 11시 군정청 앞마당에서 열린 서울시민 연합군 환영 행사에서 소련의 적화 야욕을 맹렬히 비난하여 소련과 협상하던 미국을 긴장시켰다.

이승만이 귀국하자 국내의 좌우 세력은 모두 이승만을 끌어당겼다. 한민당은 총재로, 인민공화국은 주석으로 추대했다. 우파인 한민당이 이승만을 추대한 것은 당연한 일이라 치부할 수 있지만, 이승만의 반공노선을 잘 알고 있음에도 공산당이 이승만을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한 이유는 무엇인가?

1945년 10월 20일 11시 미군정청 (일제 총독부, 후에 중앙청) 건물 앞에서 열린 ‘서울시민 연합군 환영대회’에서 나흘 전 귀국한 이승만이 연설하고 있다. 왼쪽의 선글라스 쓴 이는 미군정사령관 하지 중장이다.

총독부의 협조로 밑바닥 조직을 선점한 중도좌파 여운형의 건준이 조선공산당 박헌영의 수중으로 넘어가면서 38선 이남은 공산당 천지가 되었다. 정당과 사회단체만이 아니라 관공서, 학원, 산업체 등 남한의 모든 분야를 공산당이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했다. 라디오와 신문 등 매스컴도 좌파가 압도했고, 문화예술계도 좌파가 선점했다.

보안대, 치안대, 건국부녀동맹, 조선공산주의청년동맹, 국군준비대, 학병동맹, 건국학도대 등이 8월 한 달 동안 조직된 대표적 좌파 단체들이다. 이로부터 공산당은 11월까지 연대조직인 전국청년단체총동맹, 전국농민조합총연맹, 전국부녀총연맹, 조선문학가동맹 등도 만들었다. 이에 더해 1930년대부터 지하로 들어가 활동하던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노동총동맹을 기반으로 12월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전국농민조합총연맹(전농)도 건설했다.

민족진영이라 불리던 김성수· 장덕수·송진우·조병옥 등 우파 지도부는 좌파의 기세에 놀라 한국민주당으로 우파 세력을 통합하고 중경 임시정부 환국에 대비했다. 그러나 우파 조직은 대중이 없는 사랑방 유지들의 동아리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다. 기선을 잡은 좌파는 이승만의 인민공화국 주석 수락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승만이 주석에 취임하면 미군정에도 불구하고 인공이 사실상 정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우파가 마련한 한국민주당 총재 자리도, 좌파가 마련한 인민공화국 주석 자리도 받지 않았다. 이승만은 귀국 제1성으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며 난립한 단체들의 통합을 주문했다. 이승만은 새로운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는 승전국인 연합군의 동의를 얻을 수 있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한목소리를 내는 ‘민족통일전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를 위해 이승만은 10월 25일 한민당, 조선공산당 등 좌우익을 망라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 결성하고 막판까지 주저하는 박헌영의 참여를 촉구했다. 10월 29일 독촉 참여를 협의하기 위한 박헌영의 이승만 방문이 이루어졌다. 이 자리에서 박헌영은 민족적 통일을 위해서는 ‘민족반역자와 친일파 처단’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건국사업에 친일파를 제외하자는 원칙에 동의하지만 지금 당장 친일파가 누구인지 정할 수 없고 또한 처단할 방법도 없으니 건국 후로 미루자고 주장했다. 정국의 흐름을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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