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여 년 인도 사역 기록 책 '네, 갑니다 가요!' 펴낸 김영자 선교사

김영자 선교사가 강원도 원주 문막에 있는 독신여선교사안식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영자 선교사가 강원도 원주 문막에 있는 독신여선교사안식관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한 권의 책이 우편으로 기자에게 전달되었다. 포장을 뜯어보니 40여 년을 인도 선교에 헌신한 김영자 선교사의 열정과 영성, 사역을 담은 , 갑니다 가요!’(도서출판 디사이플)라는 책이었다.

김영자 선교사는 3대를 이어온 신앙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예수님을 모르고 세상을 살았다. 방송국의 아나운서, 성우, 탤런트를 거쳤지만 공허하고 오답 같은 삶에 회의를 느끼던 중 김장환 목사의 권고로 어머니의 죽음 이후 발길을 끊었던 교회에 다시 발을 들였다.

고 하용조 목사의 연예인 선교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만난 그녀는 DAVID E. ROSS(오대원, 예수전도단) 목사를 통해 말씀과 신앙을 공부했고, 선교의 마음을 불태웠다오클라호마(Tulsa OK USA)에 있는 문맹 선교회의 라이스 목사를 통해 자신을 선교사로 부르시는 주님의 뜻을 확인하고, 1980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세계선교부 파송으로 인도 사역을 시작했다.

그녀는 200812월 행정적으로 은퇴했지만, 인도를 비울 수 없었기에 매년 6개월씩 인도의 사역지를 돌보고, 6개월은 한국과 여러 곳에서 쉬며 말씀공부를 인도한다. 경기도 용문 소재의 여교역자 안식관에 자리를 잡았으며 2021년 강원도 원주 문막에 입주 예정인 독신 은퇴 여선교사의 집, 세빛 선교회로 거처를 옮겼다. 강원도 원주 문막에 소재한 독신여선교사안식관에서 김 선교사와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보내주신 책을 보고 인터뷰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 7일 이사하신 것으로 아는데 소감이 어떠세요?

너무 좋아요. 한국에서도 제가 거처할 방이 생겼으니까요. 은퇴하고 인천공항에 도착했을 때 거처할 곳이 없어 막막했었어요. 예전엔 찜질방에서 지내기도 했었구요. 이젠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하나님 은혜에 감격할 따름입니다. 주선애 교수님과 김화자 목사님 두 분의 헌신과 안식관을 세울 수 있도록 땅을 기증해주신 황영일 장로님, 후원해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책 제목이 시선을 확 끌어요. 이렇게 지은 이유가 궁금하네요.

사실 책을 쓰고 난 후 제목을 뭘로 지을까 기도하는 중에 일생 동안 하나님께서 저를 끌고 다니셨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나님이 제 등을 떠미셔서 여기 서있는 거지 제 힘으론 어림도 없는 일을 지금껏 해왔기 때문이에요. 선교만 하더라도 그래요. 하나님께서 교회와 담을 쌓고 살았던 저를 다시 교회로 이끌어 주셨고, 선교사로 가라고까지 하셨어요. 그런데 선교사로 부르셨을 때 선뜻 떠날 수가 없었어요. 그 이유 중 하나가 제가 다섯 식구의 가장이라는 거에요. 이건 반항이라기보다 당시 제 형편이 그랬어요. 그러니 마음이 편할 리 없지요. 하나님과 지루한 줄다리기를 하던 어느 날 주님이 아주 강한 어조로 당장 일어나 가라하시는 거예요. 그 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저는 벌떡 일어서면서 , 가요. 갑니다라고 고백하고 말았어요. 반쯤은 반항끼 섞인 목소리로 눈물을 흘리며 소리를 질렀어요. 그리고 그때부터 선교적 삶이 시작되었어요. 다소 반항적으로 보이는 제목이긴 하지만 그러나 저의 솔직한 심경을 표현하고 싶었어요.”

-책을 보니 아나운서, 성우, 탤런트셨더라구요. 그런데 결혼도 하지 않고 인도에서 40여 년 동안 선교사역을 하셨어요.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네요.

부산여상 3학년 때 부산기독교방송에서 동화낭독 요청이 들어왔어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방송에 발을 들이밀게 되었고 동아대 국문과 1학년 때인 1963년에 부산문화방송(MBC) 아나운서가 되었어요. 어머니는 다음 해에 돌아가셨구요. 문제는 아나운서 수입으론 동생들을 부양하기가 어려웠다는 거예요. 그때 문화방송국에 TV가 생겨 성우와 탤런트의 길로 들어섰지요.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말이에요. 그러던 중 극동방송의 김장환 목사님과 교계 어른 중에 김경래 장로님 그리고 하용조 전도사님 등으로 인해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예수전도단의 오대원 목사님을 통해 신앙훈련을 받고 1978년도에 문맹선교회 라이스 목사님의 권유로 필리핀 극동방송 아나운서 모집에 응하게 되었는데 초청장이 세 번이나 거절당했어요. 그리고 네 번째 초청장이 나온게 인도였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제가 인도로 가게 되었어요. 인도에 가기 전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2년간 영어공부를 했어요. 그때 한국유학생들을 모아서 성경공부를 인도했구요. 그러다가 19827월 미국에서 인도로 갔는데 당시 제 나이가 38살이었어요. 제가 결혼하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어요. 한얼산기도원 이천석 목사님과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불쑥 제가 저 시집가야 하는데요라고 말씀드렸더니 ‘30년 있으면 예수님이 오실텐데 뭘 시집가려고 하느냐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 얘길 듣고 결혼을 포기 아닌 포기가 되었어요.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어지는 거예요.”

인도 크리스천 가족들과 함께 한 김영자 선교사.
인도 크리스천 가족들과 함께 한 김영자 선교사.

-인도에선 구체적으로 어떤 사역을 하셨습니까.

선교는 감정에 의해서 시작하면 안 되는데 저는 감정으로 시작했어요. 인도는 계급제도가 엄격해요. 수드라라는 천민을 본 후 너무 불쌍하여 이들을 상대로 선교를 시작했어요. 낮은 계급 사람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하여 야간학교를 시작했지요. 학생들을 가르치려면 먼저 선생을 길러야 했기에 모아서 가르쳤어요. 제가 학교에 가면 학생들이 바글바글했어요. 그런데 알고보니 커피 마시기 위해 온 거였어요. 공부할 생각이 없어요. 왜냐하면 공부한다고 마당 쓰는 사람이 다른 일 할 수 있냐는 거예요. 공부해야 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공부를 해야할 이유를 얘기해도 소용없었어요. 안되겠다 싶어 아이들을 강제로 집에 데려와서 공부를 가르쳤어요. 39명 되었는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밥 먹여 준다니까 왔어요.”

-학교 규모와 사역에 대해 소개를 좀 해주시지요.

“1982년에 인도 땅에 발을 디딘 후 1985년에 39명의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어린이집을 시작했어요. 1991년에 2~3세 여자아이들 중심의 유치원을 운영하다가 1993년에 학교가 공식적으로 시작됐는데 현재는 초(1학년~5학년), (6~10학년), (11~12학년)를 운영하고 있어요. 학생은 1500명 정도 되어요.”

-인도 선교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요.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인도사람들의 종교성이에요. 인도사람들은 기독교도 여러 종교 중 하나로 받아들여요. 완전 혼합주의 신앙이지요. 또 하나가 선교사들을 모두 쫓아내는 거예요. 입국 신고할 때 너 선교사냐라고 물어요. 예 하면 쫓겨나요. 그렇다고 거짓말할 수도 없고. 그래서 입국 신고할 때 이런 기도를 드렸어요. ‘하나님, 제발 선교사냐고 묻지 않게 해주세요.’”

김영자 선교사가 인도에 세운 학교.
김영자 선교사가 인도에 세운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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