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학생운동 흥망사] (16) 절망 뒤에 찾아온 분신정국

자신들이 꿈꿔온 미래 대안 사회를 상실하며 절망에 빠져
'3당 합당 분쇄 투쟁'도 흐지부지...새로운 전망 창출 못해
전경들 집단폭행에 강경대 군 사망하자 항의 분신 잇따라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 창당축하연에 참석한 김영삼·노태우·김종필.
1990년 1월 3당 합당으로 창당된 민주자유당 창당축하연에 참석한 김영삼·노태우·김종필.

89년과 90년 초에 벌어진 세계사적 변화와 국내 상황은 재야와 학생운동 진영을 몸서리치게 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동서 냉전의 해체, 그리고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동부 유럽의 몰락이 가져온 정신적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학생운동권이 대안으로 여기던 사회주의 권력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89년 자기 인민을 탱크로 밀어버린 중국의 천안문사태, 그리고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죽음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상을 목격하면서 재야, 학생운동 진영은 자신들이 꿈꾸어온 미래 대안 사회를 상실했다.

그런데, 재야 학생운동에게 또 하나의 절망적인 사건이 불어닥쳤다. 여소야대 4당 체제가 일거에 무너지는 3당 합당이 단행된 것이다. 여소야대로 인해 정국운영에 한계를 느끼고, 뚜렷한 차기 후보자가 없던 노태우 정권과 민정당이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을 끌어들여 정계개편을 단행했다.

이로써 214석에 달하는 절대다수의 여당이 탄생했다. 통일민주당의 총재였던 김영삼은 3당 합당을 하면서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들어간다’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국민은 88년 총선에서 평민당에 밀려 제2야당으로 밀려난 상황을 뒤집어보려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노태우 정권에서는 처음엔 지역주의 극복을 위해 호남지역을 근거지로 하는 김대중의 평민당에 합당 제안했다. 그러나, 3당 합당에 대해 ‘내각제’ 개헌을 전제조건으로 내걸자 김대중 총재가 머뭇거렸고,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쪽이 내각제 개헌을 받아들이며 3당 합당에 이르게 되었다.

산발적인 3당 합당 분쇄투쟁

이처럼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절대다수 여당이 만들어지는 3당 합당은 재야 학생운동 세력에겐 절망스런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2월 10일 서총련에서 중앙대에서 기습적으로 진행한 3당 야합을 규탄하는 ‘반민주야합, 일당독재 음모 분쇄결의대회’가 열었다.

그리고 2월 24일과 25일에는 국민연합이 주최하는 전국 15개 도시에서 동시에 개최한 ‘반민주 3당야합 분쇄 및 민중기본권 쟁취를 위한 국민대회’가 열렸다. 부울총협(부산울산지역 대학총학생회 협의회)에서는 4기 전대협 임시의장인 송갑석(전남대 4)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미문화원 방화투쟁 계승 및 친미야합 분쇄 결의대회’를 가졌다.

하지만, 산발적인 투쟁으로 3당 합당을 저지하거나 분쇄할 수는 없었다. 정치권에서는 노무현 등 일부 국회의원들이 합당을 거부하며 탈당하고, 김대중의 평민당이 3당 합당과 내각제 개헌 음모를 저지하려는 움직임이 고작이었다.

3월 들어오면서 대학에서는 등록금 투쟁에 매달리면서 3당 합당 저지 투쟁은 소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전대협은 4기 출범식과 처음 열리는 ‘8.15 범민족대회’에 집중함으로써 3당 합당과 내각제 기도를 분쇄하려는 정치권과 거리를 두었다. 87년 대선 실패와 89년 거듭된 방북으로 야권과 재야 학생운동의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국군보안사령부에 근무하면서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들을 사찰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의 기자회견.
국군보안사령부에 근무하면서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들을 사찰했다는 사실을 폭로한 윤석양 이병의 기자회견.

윤석양 이병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 폭로

하지만, 사이가 벌어졌던 재야 학생운동과 야당은 거대 여당의 일방통행이 증가하면서 서서히 가까워졌다. 그 계기는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이었다. 90년 10월 4일 국군보안사령부(현 기무사령부)에서 복무하던 윤석양(이등병, 29세)이 정치계와 노동계, 종교계, 재야 등 각계 주요 인사와 민간인 1303명을 상대로 정치사찰을 벌였다고 폭로한 것이다.

그는 군에 입대한 뒤, 외대 재학 때 관여한 ‘혁명적 노동자계급투쟁동맹’ 사건으로 보안사에 연행된 후, 서빙고분실에서 강제로 대공 및 학원사찰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다 90년 9월 21일 새벽, 위병소 근무자가 다음 근무자를 깨우기 위해 내무반으로 들어간 사이를 이용하여, 미리 빼낸 ‘사찰대상자 명부 철’을 가지고 탈출했다.

윤석양 이병이 가지고 나온 ‘청명계획’은 89년 3월 공안정국이 조성된 직후인 4월에 만들어졌다. 비상계엄이 발동될 경우, 방해될 민간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보안사령부에서 체포 목록을 작성한 것이었다. 계엄령을 발동할 경우 체포만 남은 상황이었다. 자택의 가구 배치, 진입과 도주 가능 경로, 친인척 주거지 및 세세한 인적 사항이 ‘청명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청명계획’ 명단에는 김대중, 이기택, 노무현, 등의 정치인은 물론 김수환(신부), 한승헌(변호사), 김승훈(신부), 박형규, 문동환(목사), 송월주(불교), 이창복(재야), 이효재(여성계), 단병호(노동), 권종대(농민), 송건호(언론, 한겨레), 김지하(시인), 조혁(반미청년회), 백태웅(서울대)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망라되어 있었다. 심지어 민자당의 대표최고위원인 김영삼까지 사찰 대상으로 적시되어 있었다.

10월 13일 보라매공원에서 야당과 재야 학생운동이 결합한 ‘보안사의 민간인 사찰을 규탄하는 국민대회’가 열렸고, 대회장에는 10만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전대협 의장이 속한 대학이 전남대이고, 서총련 의장에는 PD계열인 윤진호(고대 총학생회장)가 들어서면서 여전히 야당과의 연합에 소극적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도 야당과의 연합전선은 실현되지 못했다. 여전히 재야 학생운동 진영은 야당에 대한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야당인 평민당도 재야 학생운동과 결합함으로써 김대중에 대한 ‘색깔론’ 공격이 더 강화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이처럼 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재야와 운동권은 양적으로 질적으로 확장되었음에도, 소련과 사회주의권의 몰락, 3당 합당으로 인해 새로운 전망을 창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처럼 재야를 비롯한 노동, 농민, 학생운동 세력에게 90년은 절망스럽고 우울한 해였다.

분신정국...절망에 몸무림치다

그렇게 재야와 운동권은 우울하고 절망스런 상황에서 91년을 맞았다. 그런데, 4월 26일 명지대학교 강경대가 시위 도중에 전경들의 집단폭행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윤석양 이병의 양심선언에 이어, 전투경찰의 박석진 일경이 시위 진압을 거부하고 양심선언을 하며 시위대와 전경 사이에 살벌한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또, 5월 6일에는 서울구치소 수감 중, 머리부상으로 안양병원에 이송되어 있던 한진중공업 박창수 위원장이 병원 앞마당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병원 이송과정에서부터 전노협 탈퇴 종용 등 안기부의 개입이 확인되면서 또 다른 의문사가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1991년 명지대학교 1학년생이던 강경대 군의 영결식 행렬.
1991년 명지대학교 1학년생이던 강경대 군의 영결식 행렬.

특히 강경대의 죽음은 이한열의 죽음과 연관되면서 재야 학생운동 진영을 크게 격앙시켰다. 시신이 안치된 세브란스 병원을 중심으로 신촌 일대는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재야와 학생운동은 ‘고 강경대 열사 폭력살인 규탄 및 공안통치 종식을 위한 범국민대책회의(이하 범대위)’를 결성해 대정부 투쟁에 돌입했다.

이에 놀란 노태우 정부는 안응모 내무부 장관을 경질시키고, 검찰은 강경대를 폭행 살해한 전경 5명을 잡아들였다. 29일에는 노재봉 총리가 치안장관회의에서 사과 의사를 밝혔다. 노태우 대통령도 5월 2일에 김영삼 민자당 대표최고위원과의 정례회담에서 사과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하루 뒤 청년회의소 다과회에서 "강경대 사망은 과거 민주화 투쟁 중에 벌어진 희생과는 다르다"며, 다음날 국무회의에서 전경과 백골단 해체는 없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최루탄 발사 예고제’와 ‘백골단의 진압복 착용, 경찰의 교내진입 자제’ 등을 시사했다.

이에 분노한 재야, 학생운동에서 죽음으로 항거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렇게 91년 5월 한 달은 피로 얼룩졌다. 강경대가 죽은 지 사흘 뒤인 4월 29일, 전남대학교 학생 박승희가 강경대 사망을 규탄하는 집회현장에서 분신했다. 이어 5월 1일에는 안동대학교 학생 김영균, 5월 3일에는 경원대학교 학생 천세용이 분신하였다.

또, 5월 8일에는 전민련 사회부장 김기설이 서강대학교 옥상에서 유서를 남기고 분신 후 투신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거기에 5월 12일에는 서울직장민주화청년연합 회원 윤용하가, 5월 18일에는 주부 이정순, 전남 보성고등학교 학생 김철수, 광주의 운전기사 차태권, 5월 22일 정상순이 분신을 택했다.

전국적으로 무려 9명이 분신자살을 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결국, 24일 노재봉 총리가 물러나고 정치적 성향이 옅은 정원식이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총리가 바뀐 뒤 벌어진 25일 종로에서 벌어진 3차 규탄 국민대회에서 경찰에 쫓기던 성균관대 김귀정 양이 최루탄 세례 속에 골목길로 쫓기다가 깔려 질식사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죽음의 행진, 언론의 왜곡으로 무너져

절망 속에서 벌어진 죽음의 행진은 세 가지 사건에 의해 더 아픈 상처만 남기고 끝이 났다. 하나는 재야 운동권의 정신적 지주와 같던 김지하 시인이 ‘죽음의 굿판을 거둬라’는 조선일보 칼럼이고, 또 다른 하나는 김기설 분신을 조종했다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그리고 정원식 총리 후보에게 가해진 외대생들의 밀가루 테러 사건이다.

김기설 분신자살을 배후 조종하고 유서대필을 했다는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한국판 드레퓌스사건(유대인 장교인 드레퓌스를 독일 간첩으로 몰아 종신형을 선고한 사건)으로 불린 이 사건으로 강기훈은 3년 형을 선고받아 만기출소한 뒤, 암 투병에 시달리면서도 재심을 청구하여 혐의가 없음이 증명되었다.

하지만, 김지하 시인이 쓴 ‘죽음의 굿판을 거둬라’는 칼럼과 함께 분신자살을 조장하는 배후조직이 있는 것으로, 여론이 조성됨으로써 분신 정국은 급속이 냉각되었다. 그리고 외대에 강의하러 간 정원식 총리 후보에게 밀가루 세례를 퍼부은 학생들의 거친 행동이 집중 조명되면서 지방선거는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의 압승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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