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욕(侮辱)은 한자어이다. 이 말의 뜻을 글자별로 따져보면, ‘모(侮)’는 ‘업신여길 모’ 자이고 ‘욕(辱)’은 ‘욕될 욕’ 자이다. ‘업신여기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보잘것없이 여기다’로 풀이한다. 그러니까 ‘업신여기다’에는 ‘없다’라는 의미 자질이 들어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너 같은 존재는 없는 것으로 치부하겠다. 설령 너라는 존재가 내 앞에 있더라도 내 눈에는 너를 보아야 할 가치조차 없으니, 그렇게 대하겠다. 모욕은 이런 심리적 상태에서 생겨난다.그러하니 모욕이야말로 상대가 내 존재 자체를 무시하거나 깔아뭉개는 파괴
바람은 보이지 않지만, 바람의 실체를 우리는 오감으로 느낍니다. 태풍에 나무가 흔들리고, 봄바람에 보리밭 이랑의 청보리들이 가지런히 눕는 걸 보고서, 바람을 보았다고 합니다. 바람의 힘이 미치는 현상을 본 것입니다. 만약 힘이 없는 바람이 있다면, 그 바람을 느낄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나는 바람에 유리창이 흔들리는 소리를 듣고, 저건 바람의 소리일까? 유리창 소리일까 하는 의문을 품기도 했습니다. 바람은 모습도 소리도 애매하고 모호합니다.바람의 존재에 마음을 기울이는 인간의 시선은 아름답습니다. 어떤 거룩함을 향하려는 태도도
소설은 읽는 것이다. 이는 오래된 고정된 관념인지도 모르겠다. 요즘은 소설은 듣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소설 읽어 주는 매체들이 늘어난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오랜 세월 소설을 읽기로만 수용해 온 나는 듣는 소설에 성큼 다가가지 못했다. 누군가 공들여 쓴 소설이라면 독자도 당연히 공들여 읽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의 뒤에는, 소설 읽기에 비하면 소설 듣기는 소설을 수용하는 태도에서 덜 적극적이라는 판단이 있었던 셈이다. 이런 생각이 얼마나 일반적인지는 모르겠다.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나는 헤르
인체의 특정 기관(器官)을 그릇으로 보는 인식은 이름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호흡기(呼吸器), 순환기(循環器), 소화기(消化器), 생식기(生殖器) 등과 같은 이름에는 모두 ‘기(器)’자가 들어 있는데, 이 ‘기(器)’자가 바로 ‘그릇 기’자인 것이다. 아니, 그러고 보니, ‘기관(器官)’이라는 말 자체에도 이미 ‘그릇 기(器)’자가 들어가 있다. 기관(器官)이라는 말의 풀이도 재미있다. ‘그릇과 같이 일정한 기능을 하는 감관(感官)’ 또는 ‘일정한 모양과 생리 기능을 가진 생물체의 부분’ 등으로 ‘기관’이란 말을 풀이해 놓았다.(속뜻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무엇을 하면 좋을까? 내가 무엇을 하면 더 행복해질까? 이 세상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가?”(희곡 ‘맥베스’에서 주인공의 독백 장면)여기 한 인간이 있다. 그가 자기를 향해서 묻고 있다. 진지하고 고통스럽게 묻고 있다. 그 물음은 모순과 부조리 속에 있는 자아를 향해서 토해내는, 꾸밈없는 심경 토로에 가까운 것이므로 굳이 현실적인 답을 찾아가는 물음은 아니다. 그러한 마음자리에 피어날 수 있는 것이 바로 독백이다. 세익스피어의 연극 ‘맥베스’에서 주인공 맥베스가 하는 위의 독백 또한 그러하다. 맥
젊은 시절 한때 방송국에 PD로 근무하면서 이런 생각을 견지한 적이 있었다. 인물이 좀 모자란 사람은 좋아할 수 있어도, 목소리가 나쁜 사람은 용납할 수 없다. 물론, 일반화할 수 없는 개인적 편견이다. 방송 출연자의 목소리 상태에 신경을 쓰면서 생긴 직업적 편견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여간 나는 소리에 민감한 편이다. 특별히 사람의 목소리를 남다른 민감성으로 지각(知覺)하려고 했던 편이다. 사람 목소리를 민감하게 지각하는 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그 사람이 내는 목소리의 음성 특질(voice feature)을 주목하는
“사실, 한국 축구는 그날 브라질에 이긴 겁니다.” 실제로는 브라질에 졌다. 졌지만 경기 내용 면에서 밀리지 않았음을 말하려고 말머리를 이렇게 꺼낸다. 그러나 이걸 사실이라고 표방함으로 해서 자기 주관을 마치 객관적인 것처럼 은폐한다. 다음과 같이 말해야 반듯하고 정확하다. “내 마음에는 한국 축구가 그날 브라질에 지지 않았다고 보고 싶습니다.”“사실,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문화강국입니다.” K-팝 관계자가 한류의 강세를 강조하면서 하는 말인데, 문화강국인 건 이해가 되지만 세계 최강인지는, 더구나 그게 사실인지는 동의하기 어렵다
사회나 제도를 선하게 개선해도, 인간의 범죄는 그 변화에 맞추어 기가 막힌 ‘진화(進化)’를 한다. 진화란 바람직한 발전만을 뜻하지는 않는다. 생태 환경에 따라 살아남으려는 모든 노력과 변화가 진화이므로, 범죄는 범죄대로 살아남기 위해 진화하는 것이다.요즘이 마침 대학의 합격자 발표 시즌이다. 입시생들의 마음은 합격과 불합격의 문턱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불안과 다급함과 초조함에 시달린다. 그러는 중 응시했던 대학의 입학처에서 [Web 발신]으로 합격 통보가 왔다. 메시지는 이러하다.“2024학년도 00대학교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아래
‘역량’이란 말의 뜻은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이렇게 쓰면 ‘역량’은 일반어이지만, 최근 교육학이나 경영학에서는 ‘역량’을 전문 용어로 사용한다. 특히 교육학에서는 학생을 길러내는 성취 기준으로 ‘역량’을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량’을 가르친다는 건 무슨 말인가? 학교 교육이 분편화(分片化)된 지식, 분화된 기능(技能, skill), 분류해 놓은 덕목(德目)을 가르치는 데로 가지 말고, 그것을 넘어서는 교육 목표를 추구하는 데서 역량이란 개념이 제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분편화된 지식과 기능과 덕목 등, 그 모두가
한국의 고전적 아름다움이 단아한 정서로 번져 나는 수필을 들라고 하면, 나는 윤오영 선생(1907-1976)의 ‘부끄러움’을 든다. 내가 저술한 문학 교과서에도 수록한 적이 있다. 작가의 사춘기 소년 때 경험을 수필로 쓴 것이리라. 소년은 집안 간에 잘 알고 지내는 집을 인사차 찾아간다. 방으로 들어가니, 마침 그 집 소녀의 곤때 묻은 속적삼이 걸려 있는 걸 본다. 이 장면에서 그 집 소녀가 보이는 부끄러움의 정경을 담아낸 수필이다. 소녀는 심부름하는 노파를 시켜 가만히 그 옷을 감추면서도 못내 부끄러워한다. 나는 그 부끄러움이 아
‘고함(高喊, Shout, Yell)’은 높고 크게 외치는 소리이다. ‘고함’과 붙어서 어울리는 동사로는 ‘지르다(고함지른다)’와 ‘치다(고함친다)’가 있다. ‘지르다’와 ‘치다’에는 거친 공격의 분위기가 숨어 있고, 솟구치는 감정이 따라붙는다.견물생심에 이성을 잃고, 주머니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묻지 마 구매에 몰입하는 행위가 최고조에 들었을 때, “정신없이 내질렀다.”라고 말하는데, 이때 ‘지르다’의 진면모가 나타난다. ‘치다’는 어떤가. 어떤 상대를 힘껏 때리거나 두들기는 것이 ‘치다’이다. 공격하다, 쳐들어가다 등등의 가해
1966년에 나와서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가요로 이 있다. “사나이 우는 마음을 그 누가 알랴”로 시작하는 가사는, 순정으로 사랑했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한 여리고도 아픈 마음의 사나이인 나를 갈대에 이입(移入)한다. 우는 갈대 저 마음이 내 마음 같고, 사랑에 우는 내 순정이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순정으로 동일시되는 정조를 만들어 간다. 가을 갈대 서걱이는 소리를 들으며, 그걸 왜 우리는 갈대가 ‘우는 소리’로 들으려 할까.생의 고난과 존재의 허허로움을 웅숭깊게 응시하는 시로 신경림의 시 를 넘어서는 작품이 있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듣기는 ‘내가 나를 듣는 경지’이다. 물론 여기에도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나의 발성을 내가 듣는 차원이다. 예컨대 노래를 연습하는 가수들을 보면, 자기가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를 자신이 헤드폰으로 들으면서 부른다. 내가 부르는 내 노래를 내가 듣기 위함이다. 그래야 가수는 자기 노래를 마음대로 즐기면서 부를 수 있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그야말로 내 내면의 소리, 내 영혼의 소리를 내가 듣는 차원이 있다. 면벽참선(面壁參禪)의 심연에 든 고승이 깨닫는 내부로부터의 각성 등이 여기에 들 것
헤르만 헤세의 소설 에는 주인공 에밀 싱클레어가 악동(惡童)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고통스러운 괴롭힘을 당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 대목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겪은 일과 너무도 닮아서 놀란다. 그해 나의 어머니는 멀리 떨어져 계시고, 나는 홍역을 오래 앓았다. 약하고 외로워 보였던 탓일까. 우리 반에 크로머 같은 아이가 있었는데, 그가 나를 줄기차게 괴롭혔다. 크로머가 싱클레어를 못살게 괴롭혔듯이 나를 괴롭혔다.나는 기도했다. 그 아이를 내게서 멀리 있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 아이를 하나님이 벌해 줄 것을 기도했
묵은 책장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30년도 더 지난 나의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아마도 써놓고 부치지 못한 편지였던 듯하다. 내가 내 글을 읽으면서도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은 시간이 오래 지난 탓일까. 시절로 치면 꼭 이맘때쯤의 서간이다. 편지의 서두는 이러하다.“하늘 높아지고 물빛도 서늘합니다. 밤이면 은하의 별 무리 총총하고, 그 별빛에 화답하듯 지상의 온갖 풀벌레 울음소리 적막 가운데 가득합니다. 가을 오는 소리 기척에 귀는 밝아지고 정신은 맑아지는 듯합니다. 청량한 기운이 다가오는 9월입니다. C 선배님! 그간도 별고 없으셨는지
소리도 풍경(風景)으로 남는다. 중학생이 된 소년은 통학 거리가 멀어졌다. 6㎞ 등굣길을 걸어서 간다. 인적 없는 들길, 언덕길, 공동묘지 옆길, 철길, 저수지 길, 신작로 길 등을 한 시간도 넘게 걷는다. 소년은 6시에는 잠을 깨어서 우물에서 길어온 찬물로 세수를 하고, 책가방을 챙기고, 어머니가 해 주신 밥을 먹고, 늦어도 일곱 시에는 길을 나선다. 어제도 밤이 늦도록 호롱불 밑에서 숙제를 한 열세 살 중학생, 소년은 고단하다.소년의 곤한 잠을 깨우는 건 두 가지다. 우선은 부엌 연기다. 꼭두새벽 어머니가 밥 지을 아궁이에 불을
조용히 말씀드릴 것이 있다며, 후배가 비밀스레 말을 꺼낸다. 틀림없는 정보라고 말하며, 후배는 그가 벌이려는 일에 내가 참여하기를 은근히 권한다. 나는, 지금 그 정보라는 것에 유혹되고 싶지 않다. 번뇌를 불러들이는 일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상대는 지금 선의를 품고 말하고 있다. 나를 위한답시고 하는 말이다. 적어도 나를 힘들게 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다. 이런 말을 듣고서 어떻게 말하면 좋은가.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화법이 거절의 화법이다.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으면서, 상대를 거절하는 커뮤니케이션 스킬(communication
6‧25 때 북한 동포들이 공산 치하를 버리고 국군을 따라서 대거 남으로 피난을 온 것은 1951년 1‧4 후퇴 때였다. 압록강까지 진격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면서 다시 서울을 내어주던 때가 그해 1월 4일이었다. 아군의 후퇴로 전선은 흩어진다. 오늘까지 국군의 지역이지만 하룻밤 사이에 적군이 들어온다. 국군만을 따라 내려오던 피난민들은 목숨이 오가는 위태로움에 직면한다. 저들에게 들키지 않고 여길 벗어나야 한다. 밤을 도와 강을 건너고, 길을 버리고 험준한 능선을 넘는다.피난민들의 수많은 증언 가운데 그 숨
순전히 논리적으로 따져보기로 했을 때, 인간의 ‘듣는 행위’가 이루어지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하나는 인간의 청각 기능이 온전해야 한다. ‘듣지 못하는 사람’은 세상과의 고립에 직면한 존재이다. 다른 하나는 ‘들을 소리’가 있어야 한다. 사람의 말소리이든 자연의 소리이든 소리가 존재하지 않는데, 들을 수는 없다. 너무도 당연한 조건이어서 하나 마나 한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과 자연 세계에 대한 겸허한 통찰에 다가가게 한다.모든 듣기를 온전하게 누리는 사람일수록 ‘듣지 못하는 타자’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렵
아랫사람이 아부하는 걸 아주 싫어하는 회장님이 있었다. 직원들은 회장님 앞에서는 아부하는 인상을 주지 않으려고 조심하였다. 그런데 회장님의 측근 중 이런 사람이 있었다.그는 회장님이 임석하는 공식 비공식 모임 등에서 자신이 발언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우리 회장님은 아부하는 사람을 정말 싫어하시는 강직한 분이십니다”라고 말하였다. 어떤 자리에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부를 싫어하는 회장님을 모시는 저도 아부를 싫어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회장님은 이 사람을 크게 신임하게 되었다. 그가 회장을 두고 ‘아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