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엔저)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서 엔·달러 환율이 150엔을 넘어섰다. /연합
21일 오후 서울 중구 하나은행 본점 딜링룸에서 직원들이 업무를 보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엔저)에 제동이 걸리지 않으면서 엔·달러 환율이 150엔을 넘어섰다. /연합

일본 정부가 엔화가치의 추락을 막기 위해 외환시장에 개입하면서 엔·달러 환율이 연일 요동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환율이 32년 만의 최고치인 151.92엔까지 치솟은 지난 21일 기습적으로 외환보유액의 달러 일부를 팔아 엔화를 사들였다.

지난 24일에도 엔·달러 환율이 순식간에 4엔 이상 떨어지는 일이 발생했는데, 시장에서는 일본 정부가 사흘 만에 또다시 시장에 개입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2개월간 외환시장에서 환율 방어를 위해 570억 달러(약 81조9000억원) 이상을 썼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올해 초만 해도 110엔 안팎이었던 엔·달러 환율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후 거침없이 올랐다. 고물가를 잡기 위해 잇따라 기준금리 인상을 단행한 미국과 달리 일본은 경제 회복을 염두에 둔 초저금리와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지속해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팔고 달러를 사는 움직임이 가속화됐다. 엔화가치의 ‘날개 없는 추락’인 셈이다.

스즈키 슌이치(鈴木俊一) 일본 재무상은 시장 개입 여부에 대해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상 ‘복면’을 쓰고 엔화를 사들이는 개입을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스즈키 재무상은 "(환율에) 과도한 변동이 있으면 단호한 조처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서 외환시장 개입에 나설 수 있음을 여러 차례 시사한 바 있다.

문제는 일본은행(BOJ)이다. 일본은행이 초저금리 정책을 고수해 미국과의 금리격차가 더 벌어지면 일본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해도 약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구로다 하루히코(黑田東彦) 일본은행 총재는 지난 19일 참의원 예산위원회에 출석해 "안정적인 엔저 움직임이 있다면 경제 전체에 플러스로 작용한다"며 여전히 엔저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음을 내비쳤다.

아다치 세이지(安達誠司) 일본은행 심의위원은 한 술 더 뜨고 있다. 그는 금융완화 정책에 대한 수정은 시기상조라고 잘라 말한다. 금융완화 정책을 바꾸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그때 그때마다 대응하게 되면 오히려 향후 정책 운영의 불투명성을 높인다"며 "긴 안목으로 본다면 일본 경제에 좋지 않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150엔을 넘어선 엔화가치 하락으로 일본의 가계와 기업들은 보릿고개를 겪고 있다. 경제 컨설팅기관 미즈호리서치앤드테크놀로지스에 따르면 엔·달러 환율이 145엔 정도를 유지할 경우 2인 이상 가구의 올해 월평균 지출액은 전년보다 8만1674엔(약 79만원) 증가할 것으로 전망됐다. 150엔 선에서 등락하면 5000엔이 추가된다. 기업 역시 엔저에 따른 수입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고통이 심화되고 있다.

엔화가치의 급락은 허약해진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을 반영하는 것이자 일종의 경종(警鐘)으로 볼 수 있다. 극심한 저출산·고령화 속에 산업구조 개혁을 통한 경제체질 개선은 외면한 채 마이너스(-) 금리 및 무제한 양적완화에 매달린 아베노믹스가 시발점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전 총리가 쏘아올린 세 개의 화살 중 무제한 양적완화와 공격적 재정지출의 외상값이 돌아오기 시작했고, 구조개혁마저 실패하면서 일본 경제는 치명적 내상을 입었다. 화살 하나는 쉽게 꺾이지만 세 개를 한 번에 꺾기는 어렵다는 아베 전 총리의 주장이 허상으로 드러난 셈이다.

일본 기업들은 가격경쟁력 측면에서 엔저가 가져다주는 잠깐의 ‘공짜 이익’에 중독됐다. 글로벌 트렌드로 부상한 디지털 전환과 신기술 개발, 성장산업 투자를 소홀히 하면서 첨단산업의 주도권을 한국·미국·대만에 내주게 됐다. 특히 무담보·무이자 대출을 통해 경쟁력 없는 중소기업까지 연명시킨 결과 좀비기업이 급증했다.

일본 정부가 무제한 돈 풀기에 나서면서 국채 잔액은 1000조엔을 넘긴 상태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부채 비율이 260%에 달해 세계 최고 수준이다.

특히 일본 경제를 떠받치던 무역수지마저 무너지고 있다. 일본의 무역적자는 지난달 2개월 연속 2조엔(약 19조3000억원)을 넘어섰다. 최근 1년간 무역적자 규모는 14조엔(약 135조원)으로 최대 기록을 세웠다. 에너지부터 식료품에 이르기까지 수입에 의존하는 경제 구조 탓에 엔화가치 하락의 타격이 훨씬 큰 것이다.

최근의 엔화가치 추락은 산업구조 개혁 외면, 방만한 재정 운영, 그리고 엔저 중독 등 늪에 빠진 일본 경제의 현실을 보여주는 자화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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