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공작 70년사] 민족일보와 조용수

좌익진영 언론계 활동 중 지명수배...51년 밀항선 타고 일본행
조청련 지시·지원으로 4.19 직후 귀국 민족지 창간 공작 추진
5.16이후 반국가행위 활동 혐의로 최백근과 함께 사형됐지만
노무현 정부 과거사위서 재심 권고로 2008년 무죄 선고 받아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에서 검사의 논고를 듣고 있는 피고인들. 앞줄 맨 왼쪽이 민족일보 대표.
1961년 8월 11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린 민족일보 사건 변론 공판에서 검사의 논고를 듣고 있는 피고인들. 앞줄 맨 왼쪽이 민족일보 대표.

1960년 4.19를 전후한 시기에 전개된 북한의 대남공작에 대해 얘기할 때 ‘민족일보 사건’을 빼놓을 수 없다. 민족일보 사건은 한마디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용수가 4.19 직후의 국내 혼란상황을 이용해 새로운 민족지 성격의 신문 ‘민족일보’를 창간하고 그것을 거점으로 하여 합법정당 창당 공작과 통일전선 형성 공작을 추진하다가 5.16 이후 신문사가 폐간되고 사장인 조용수가 체포 처형된 사건이다.

1930년 4월 24일 경남 진양(현재의 경남 진주)에서 태어난 조용수는 서울에서 좌익진영 언론계에 몸을 담고 활동하던 중 수사당국의 지명수배를 받게 되자 1951년 9월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피신했다. 일본으로 건너간 조용수는 도쿄에 살면서 계속해서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전후 복잡한 틈을 타 국내에도 여러 번 다녀간 바 있다.

1950년대 말 조용수는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대남간첩 이영근과 수시로 접촉하였다. 이영근은 진보당 당수 조봉암의 비서 출신으로서 간첩혐의로 기소되어 공판계류 중 1958년 1월 보석 중에 일본으로 망명한 인물이다. 이와 함께 조용수는 동포사회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의 지령에 따라 일본 및 한국에 대한 각종 대남공작을 지도하고 있던 김병식과도 정치적으로 연계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가 나중에 한국에 들어와 민족일보를 창간한 것도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대남공작을 담당하고 있던 김병식과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령에 따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용수와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던 김병식은 원래 국내에서 언론활동을 했던 경험도 있고 사회적 지위도 있던 인물이다. 1919년 2월 전남 무안에서 태어난 김병식은 일본 동북대학을 졸업하고 국내에서 활동하다 일본으로 건너간 인물이다. 조용수를 만날 당시에는 일본 내 친북조직이자 공작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재일조선인총연합회(약칭 조총련) 산하 조선통신사 사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는 1966년에는 조총련 부의장에 임명되었고 1970년에는 제1부의장을 역임하는 등 일찍부터 조총련 조직의 중요 직책에서 활약하면서 대남ㆍ대일 공작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북한의 신임을 받으면서 활동하던 김병식은 조총련의장이었던 한덕수와의 불화 등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1972년 10월 일본을 떠나 북한으로 들어가 눌러앉게 되었다. 북한에 들어가서는 노동당 대남공작부서인 통전부에서 일하다가 1993년 7월 사회민주당 위원장으로 발탁되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부주석에 전격 임명되어 활동하던 중 1999년 7월 사망한 핵심 노동당원이었으며 김일성의 충실한 혁명가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1952년부터 일본에서 조총령계열의 조선통신사 사장으로 활동하던 김병식은 자신과 굳건한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던 조용수의 사상동향과 언론인으로서의 능력 등을 고려해 볼 때 그가 한국에 들어가 새로운 신문창간 공작을 실행할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조총련 한덕수 의장과 조용수에 대한 공작방향을 협의한 후 북한 공작지도부에 동 문제를 제기해 승인받았다.

북한 노동당 대남공작지도부의 허락을 받은 조총련의장 한덕수와 김병식은 조용수를 직접 만나 그에게 서울로 들어가 민족지 성격의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여 강력한 정치선전 수단과 정치활동 거점을 구축할 것을 지시하고 신문창간에 필요한 자금 등은 김병식이 제공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조용수는 1960년 6월경부터 서울에 들어와 4.19직후 국내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적 무질서를 이용해 새로운 성격의 민족지 창간 공작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게 된 것이다.

조용수는 먼저 민족지 창간 주체로서 ‘민족일보사’를 창설하고 사장으로 취임했다. 사옥은 당시 서울시 서대문구 정동(현재의 중구 정동)에 있었다. 신문사를 설립한 조용수는 신문창간을 위한 각종 실무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주력했다.

조총련 의장 한덕수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나고 있다.
조총련 의장 한덕수가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만나고 있다.

그러던 중 1960년 9월경 일본에 다시 돌아간 조용수는 북한 공작지도부의 지시에 따라 비밀리에 공작선을 타고 북한으로 몰래 들어가 김일성을 만났다. 김일성까지 만난 것은 철두철미 북한 대남공작지도부의 지령에 따른 것었다. 이는 조용수가 이미 북한 노동당에 입당한 노동당원일 뿐만 아니라 북한의 대남공작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일성은 앞서 얘기한 성시백이나 박정호, 최백근이나 이선실과 같은 거물급 간첩이 아니면 만나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직접 만나주는 등 북한으로부터 열렬한 환대와 함께 공작임무를 부여받은 조용수는 다시 공작선을 타고 일본을 거쳐 서울로 되돌아와 신문창간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을 통해 그는 19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정식으로 창간하는데 성공했다. 창간준비 당시에는 ‘대중일보(大衆日報)’로 시작하였으나 민족일보로 바꾸어 등록허가를 받았다.

신문창간 당시 민족일보는 ‘민족의 진로를 가리키는 신문,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신문, 노동대중의 권익을 옹호하는 신문, 양단된 조국의 비애를 호소하는 신문’임을 표방하는 동시에 혁신계의 주장인 남북협상과 남북교류, 중립화통일과 민족자주통일 등을 옹호하는 방법으로 북한의 노선을 우회적으로 대변하였다.

국내에서 민족일보가 창간되자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는 한국 내에 유력한 정치선전 활동 수단과 정치투쟁의 무기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북한 공작지도부는 새로운 합법정당 창당과 통일전선 형성을 위한 활동거점, 공작거점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이다. 민족일보를 창간한 조용수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북한으로부터 최고의 훈장이라고 할 수 있는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그러나 5.16 혁명 이후 민족일보는 반국가적ㆍ반혁명적 신문이라는 이유로 5월 17일부터 신문 발행이 정지되었다. 5월 19일에는 계엄사령부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았다. 그리고 8월 21일에는 혁명재판소에 의해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 혐의로 조용수 등 민족일보 간부 13명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1961년 10월 31일 열린 최종공판에서는 ‘공산당 자금으로 신문을 발행함으로써 특수반국가행위에 해당하는 활동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사형 3명, 5~15년 징역형 5명, 무죄 5명 등의 판결이 확정되었다.

그 후 국제신문인협회와 국제펜클럽 등 국내외 각계의 진정과 호소로 사형을 선고받았던 3명 중 논설위원 송지영, 감사 안신규는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다. 그러나 사장이었던 조용수는 사회당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 간첩혐의로 체포된 최백근과 함께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한편, 그때로부터 45년이 지난 2006년 1월 조용수의 동생 조용준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에 민족일보 및 조용수 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하였다. 조용준의 진실규명 신청이후 과거사위원회는 같은 해 11월 ‘사형을 선고한 혁명재판부의 판단이 잘못됐다’는 결정을 내리고 국가에 재심을 권고하였다.

이에 따라 2008년 1월 1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가 재심을 열고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특수범죄 처벌에 관한 특별법’ 혐의로 사형이 선고되었던 조용수에게 무죄를 선고한 바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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