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공작 70년사] 황태성 체포 이후 계속된 공작 실패

김종필 서울대 동창·옛 여인 주장 女공작원 훈련중 허언 드러나
유원식 친척은 가정부로 침투했으나 임무는 입도 못떼고 발각
김일성, 예정된 공작 중단...5.16정권 친미매국세력으로 매도해

1962년 1월 20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중앙정보부를 방문했다. 맨 왼쪽이 김종필 정보부장이 박 의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통화하는 모습.
1962년 1월 20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중앙정보부를 방문했다. 맨 왼쪽이 김종필 정보부장이 박 의장이 지켜보는 가운데 통화하는 모습.

중앙정보부는 그 후 김민하, 권상능 등의 주소지 및 동향을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이를 바탕으로 신고를 받은 지 열흘만인 10월 20일 김민하의 집을 급습하여 거기에 잠복하고 있던 황태성을 체포했다. 아울러 이 사건 관계자인 김민하와 권상능 등도 동시에 검거했다.

황태성은 검거된 후 2개월간에 걸친 심문에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나중에는 중앙정보부장을 만나야 모든 것을 털어놓겠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중앙정보부에서는 모 경찰관을 중앙정보부장으로 변장시켜 호텔에서 황태성을 만났다. 황태성은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이 북한의 간첩임을 자백하고 자신의 공작임무는 정부 고위급을 만나 ‘남북협상을 제안’하는데 있다고 털어놓았다.

결과적으로 북한에서 수립한 공작계획대로 대상자를 직접 접촉해 편지전달을 설득하는 방식으로 하지 않고 현지에서 자의적으로 판단해서 간접전달 방식으로 공작을 벌이다. 황태성 자신이 북한에서 침투했다는 사실만 노출시켰고, 검거까지 된 것이다.

물론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럼에도 만약 황태성이 직접 조귀분 여사를 찾아갔더라면 박정희 장군에게 편지를 전달해달라는 부탁은 거절당했을지 모르겠으나 최소한 조귀분 여사가 남편의 절친한 친구인 황태성을 인정상 수사당국에 신고하지 않았을 지도 모를 일이다.

또 황태성이 임미정 부부를 통해 자신의 신분과 주거지가 노출되었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다른 곳으로 곧바로 피신하거나 북한으로 복귀하지 않고 외부활동만 중단한 채 그대로 김민하의 집에 잠복하고 있다가 검거된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황태성이 검거를 ‘자처한’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조귀분 여사, 황태성을 중앙정보부에 신고

어찌되었던 조귀분 여사는 임미정 부부를 만난 다음 날인 10월 10일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황태성이 북한에서 내려왔다는 사실을 중앙정보부에 신고했다. 이 일로 인해 황태성은 검거되었다.

황태성은 1961년 11월 20일 간첩죄로 구속 송치되어 같은 해 12월 27일 육군 중앙고등군법회의(제1심)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간첩방조 및 불고지 등으로 구속 송치된 권상능은 징역 15년(실제로 2년 징역, 조선화랑 대표), 김민하는 권상능과 같은 죄로 징역 10년을 언도받았다.

그 후 제2심인 육군 고등군법회의(1962년 9월 11일)를 거쳐 1963년 10월 22일 대법원에서 황태성의 사형이 확정되었고 같은 해 12월 14일 인천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이후 북한 공작지도부는 황태성의 공작실패 원인에 대해 자신의 생명이 걸려 있는 중차대한 임무 즉 한국의 최고지도자에게 보내는 중요한 비밀편지를 원래 계획대로 직접 전하지 않고 제3자를 통해 전달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황태성 자신이 조귀분 여사를 비밀리에 만나 박정희 장군에게 보내는 편지전달 가능성 여부를 확인하고 거부할 경우 비밀을 지킬 것을 부탁하거나, 여의치 않은 경우 협박하는 방식으로 안전장치를 했더라면 체포되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겁이 많은 2번 ‘황태성’ 김모와 계속되는 공작실패

한편 황태성이 서울에 침투한 후 공작계획에 반영된 일정대로 공작이 진척되지 않는데 조급한 북한 공작지도부는 이미 파견을 위해 준비시켰던 4명의 후보 가운데 여러 가지 측면에서 장점이 많은 김모를 9월 중순 서울에 침투시켰다.

앞서 황태성이 안내원들의 도움을 받아 임진강을 통해 수중침투 방식으로 한국에 침투했다면 김모는 육상에 설치된 휴전선철책을 돌파해 침투하는 전형적인 육상침투 방식으로 침투시켰다.

황태성 체포 이후 남파시킨 공작원이 침투 경로로 이용한 휴전선 철책.
황태성 체포 이후 남파시킨 공작원이 침투 경로로 이용한 휴전선 철책.

그런데 김모 공작원을 서울에 침투시키는 과정에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모 공작원의 안내를 담당한 전투조는 원래 휴전선을 넘어 광릉까지 김모 공작원을 안전하게 데려다주는 데까지 1주일이 들고 그들이 김모 공작원과 헤어진 후 북한으로 복귀하는데 3일 가량이 필요해 김모 공작원 안내에 총 10일 정도 걸리는 것으로 계획하고 침투했다.

그런데 안내조와 김모 공작원이 출발한 지 10일 만에 계획대로 안내조가 북한으로 복귀하기는 했다. 하지만 안내조만 복귀한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어야 김모 공작원도 함께 북한으로 복귀해서 공작지도부를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나중에 공작지도부에서 경위를 상세히 파악해보니 안내조가 김모 공작원을 데려다주기로 한 마지막 지점인 광릉까지 도착했는데 김모 공작원이 극도로 불안해하면서 공포에 질려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겠다며 애걸복걸하고 통사정을 해 전투조가 어쩔 수 없이 다시 공작원을 데리고 복귀했다는 것이었다. 한마디로 적지에 침투하니 죽을까 봐 겁이 나서 도망쳐온 것이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지만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렇게 의지가 나약한 인물을 남파공작원으로 선발한 것 자체도 잘못이었다. 하지만 설령 선발과정에 걸러내지 못했다면 교육 및 훈련 과정에라도 철저히 검증해 의지가 나약한 것을 밝혀내고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하지만 워낙 공작원 선발과 교육 및 훈련, 침투 등 전과정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지다보니 담당 간부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도 무리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김모를 공작원으로 선발하고 침투시키는데 관여했던 담당 간부들이 문책을 당하고 공작원 자격이 없는 김모는 해임하는 것으로 이 공작은 마무리되었다.

또한 그 사이에 5.16 주도세력인 김종필과 유원식에 대한 공작도 추진했으나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김종필에 대한 공작을 위해 김종필의 서울대 사대 동창이면서 김종필과 연애를 한 적도 있다고 주장하는 이모 여인을 공작원으로 선발해 교육과 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그 준비과정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하고 그의 주장도 지나치게 과장되었음이 확인되어 공작자체를 백지화한 일이 있었다.

유원식에 대한 공작에 있어서는 그의 친척인 유모 여인을 공작원으로 선발하여 교육 및 훈련을 시켜 한국에 침투시키는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유모 여인은 서울에 침투한 후 친척들의 도움으로 유원식의 집 가정부로 들어가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유모 여인이 유원식에게 자신의 신분을 비롯하여 유원식을 찾아온 사유를 비밀리에 자세히 털어놓을 기회를 잡지 못해 유원식은 유모 여인이 남파된 사실을 전혀 몰랐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2년 초 수사망이 좁혀들고 있는 것을 유모 여인이 눈치채고 그의 집에서 나온 후 숨어 지내다가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유원식의 집까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잘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황태성이 1961년 10월 20일 체포된 뒤 대북무전보고가 끊어졌지만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그가 체포된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10월 말에 조총련을 통해 황태성이 체포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러나 중앙당 연락부는 황태성이 체포되었다는 조총련의 정보를 전적으로 믿을 수 없어 다른 루트를 통해 확인해보았으나 관련 정보가 사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박정희에 대한 북한의 오판

황태성 체포 전후 일본을 통해 5.16 군사쿠데타 주도세력에 대한 정보를 지속적으로 수집해 분석한 결과 박정희에 대한 경력 및 평가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 속속 확인되었다. 특히 박정희가 과거에 비록 남로당에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1948년 김창룡이 주도한 군내 좌익분자를 색출하는 숙군 작업 과정에 여순사건 등에 연루된 혐의로 체포되어 1심 재판에서 불명예 전역 및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후 변절하여 조직을 탄로시킨 장본인이라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결과적으로 처음부터 박정희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와 평가에 기초해 조급성과 함께 박정희에 대한 막연한 환상까지 가지고 공작을 추진했기 때문에 실패로 귀결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태성의 체포와 박정희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의 정보가 입수되면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북한 지도부의 기대는 완전히 허물어졌다. 이에 따라 황태성 후속으로 진행하려던 여러 형태의 공작을 전면 중단시켰다.

그리고는 더욱 노골적으로 5.16 군사정권에 대해 반혁명, 반민주, 반민족, 친미매국세력으로 매도 공격하며 정치공세를 강화하였다.

한편, 김일성은 황태성이 체포되면서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한 접근공작이 실패로 돌아가자 1961년 11월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회의를 열고 5.16 군사쿠데타이후 전개한 대남공작 전반을 결산하고 대남기구 개편 및 인사조치를 취하였다.

이 조치에 따라 1960년 4.19를 겪으면서 급변하는 정세에 맞게 대남공작을 통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1961년 1월 경 연락부와 문화부 등 대남공작부서를 총괄할 중간 지도기구로 창설했던 남조선국을 해체했다. 남조선국 국장에 임명했던 이효순은 평양시 당위원장으로 전보 조치하고 연락부장이었던 어윤갑은 사상검토 및 재교육 차원에서 중앙당학교로 보냈다. 그 자리에는 남조선국 부총국장이었던 김일성의 빨치산동료 서철을 임명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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