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조우석

얼마 전 우연찮게 작곡가 반야월(1917~2012, 본명 박창오)의 딸 희라 씨를 만났다. 평소 필자의 문화관을 털어놓았다. "선친은 이 나라 문화대통령으로 평가받아야 옳다." 그때 속사정을 알면서도 짐짓 물어봤다. "선친 삶을 담아낸 평전, 전기물은 몇 종인가?" 짐작대로 거의 없었다. 그게 현실이다. 콘텐츠의 출발인 책이 그 정도라면, 나머지도 알 만하다. 5000곡 가요를 작사·작곡했던 분, 한국의 슈베르트에 대한 사회적 예우가 그 정도다.

그와 상관없이 대중은 열광한다. 반야월 노래비가 전국에 가장 많다는 것도 그걸 보여준다.‘울고 넘는 박달재’(작사), ‘불효자는 웁니다’(노래),‘단장의 미아리 고개’(작사) 등은 불세출의 명곡을 뛰어넘어 그 자체가 20세기 우리 삶이다. 유명세 탓에 일제 압박도 피할 수 없었다. 일부 친일가요를 만든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훗날 친일파 소리가 나왔을 때 "무슨 말을 해도 핑계다"라고 선선히 시인했던 게 그였다.

반야월만이 아니다. 또 다른 걸출한 작곡가 박시춘(1913~1996, 본명 박순동). 그가 만든 ‘신라의 달밤’,‘가거라 삼팔선’,‘굳세어라 금순아’를 어찌 잊을까? 반야월·박시춘은 누가 뭐래도 우리시대 문화대통령이 맞다.

가요사에 관심 많은 김장실 전 차관과 이동순 영남대 명예교수가 최근 알려준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다. 청록파 시인 조지훈이 생전 "내가 평생 시를 써왔지만,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실력은 대중가요 한 편만도 못했다"고 자탄했다는 것이다. 역시 일급 지식인은 다르다. 괜한 거드름을 피우는 고급문화의 우월의식이란 아류의 몫이지, 정작 시문학사에 빛나는 조지훈에겐 그런 이분법 자체가 없었다. 시인 김지하도 그랬다. 생전의 그가 알지 못하고 부르지 못하는 가요가 없었다. 요절 시인 기형도 역시 트로트를 그렇게 맛있게 부르는 능력자였다. 그렇다.

지난 100년 우린 트로트에 울고 웃었다. 시인 김소월·서정주·이육사가 ‘먼 그대’였음에 비해 대중가요는 살가운 친구와도 같았다. 그런 천하의 반야월·박시춘에게 문화훈장 하나를 주고 손 털었던 게 예전의 시대착오적 대한민국 정부다. 문화훈장 중 화관(반야월), 보관(박시춘)의 훈격(勳格)에 그쳤으니 두루 아쉽다. 요즘 트로트 열풍 와중에 되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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