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신
임명신

양력설 음력설 양쪽 다 공휴일로 하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지 싶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내내 엎치락뒤치락 우여곡절을 겪었다. 세계 보편의 태양력(Gregorian calendar, 1582년 제정)이 공식 도입된 것은 갑오개혁(1896) 때였으나, 별 실효가 없었다. 음력설이 ‘구정(舊正)’으로 격하된 것은 조선총독부에 의해서다. ‘근대화=서구화’ 시대에 양력이 기본이었다. 그 때까지 사람들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12개 시간대로 나눠진 하루, 상중하 열흘(旬)씩 구분된 한달, 1년 24절기를 살았다. 하루 24시간X7일=1주, 4주가 1개월… 이런 시간의 매트릭스로 들어가는 것, 그에 맞는 시간관·가치관의 세계로 진입하는 게 근대화였다.

일제가 음력설을 단속한 것은 명치유신을 거쳐 일거에 양력으로 옮겨 탄 일본처럼 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조선인들은 숨어서 제사를 지내는 등 음력을 고수했다. 해방 후 여전히 양력이 공식이었으나 재량에 따라 음력설은 대부분 휴무가 됐다. 그런데 박정희 정부 들어 양력설이 ‘신정(新正)’으로 격상, 음력설은 직접 간접의 억제를 받았다. 산업국가로의 대전환이 추진된 시기였다. 이후 전두환 정부 때 음력설은 공휴일 ‘민속의 날’이 됐고, 1989년(노태우 정부) ‘설날’ 이름을 되찾았다. 결국 두 개의 설은 각각 3일 연휴로 운영되다, 김대중 정부의 공휴일 축소 방침에 따라 양력설 연휴가 줄어 현재에 이른다.

역법(曆法)은 농경에 필수불가결하다. 위도·경도 차이로 중국 역법이 한반도에 완벽히 들어맞지 않아, 세종대왕은 조선에 맞는 달력을 내놓고 장영실을 등용해 물시계를 만들었다. 한편, 계절 변화를 감지하기 어려운 음력을 양력으로 보완한 게 1년 24절기다. 세시풍속은 1년을 쌀농사와 관련된 24 단계로 구분해 사람들의 일상을 재구성한 것이다. 농경사회적 윤리를 지배한 주자학과 맞물려 ‘농업은 천하의 큰 근본’이라는 발상 또한 자연스럽게 자리잡았다. 토착화한 농경문화에선 땅과 조상신(社稷) 숭배가 중요하다. 유교국가 조선에서 음력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던 이유다. 제사=정체성이었던 것이다.

천제의 운동과 인간의 삶을 긴밀하게 연관시킨 천문 역법은 고대 이래 첨단 과학기술이자 문명사의 한 축이었다. 사막에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자연재해에 대처하려면 ‘하늘의 글(무늬)=天文’을 알아야 했다. 농경시대가 되자 ‘먹고 살기 위해’ 여전히 천문 지식이 필수적이었다. 정치 권력은 천문 지식을 통해 지배의 정당성을 확인받았다. 경주의 첨성대처럼 그리니치 천문대 역시 버킹엄 궁전 가까이 있다. 19세기 후반 ‘시간의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에서 영국이 승리, 세계 시간의 표준은 그리니치 표준시가 됐다. 현대인의 삶은 이 틀을 벗어날 수 없다.

1868년 이래 일본에선 민간의 습속까지 빠르게 양력으로 대체된다. 1912년 중화민국 역시 모든 공적 시간을 서력(양력)에 맞췄다. 중화권의 음력설(春節)은 봄맞이 축제에 가깝다. 양력설에 끝까지 저항한 게 우리나라다. 변함없이 제사와 주요 명절을 음력으로 지낸다. 소수의 농업인구가 전체를 먹여살리며 날씨에 사활을 걸지 않는 과학영농의 시대, 음력은 기일(忌日)이나 사주팔자를 따질 때 정도의 의미가 된 시대에 말이다. 어쨌거나, 음력설에 대해 ‘민족의 명절’ ‘일제와 독재시대를 넘어 살아남은 민족문화’, 식의 설명은 이제 그만했으면 한다. 시대착오적인 서사다. 산업국가에 맞는 시간관을 심으려 했던 것을 ‘음력설 탄압’으로 기억하는 것 같다. ‘조국근대화’, 전통과의 불가피한 대결에서 권위주의적 리더십을 발휘한 것이라는 해석이 훨씬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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