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영
정구영

좌파진영이 국내 진보 경제학의 태두(泰斗)로 떠받들어온 변형윤(邊衡尹)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12월 별세했다.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후 1955년부터 모교 강단에 서기 시작해 1992년까지 후학을 양성했다. 그가 한국 경제사에 본격 등장한 계기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반대다.

경부고속도로는 우리나라 교통망 발전에 한 획을 그은 역사(役事)다. 1970년 7월 428㎞의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통행과 물류의 획기적 증대를 가져왔다. 거대한 경제적 파급효과를 낳은 것이다. ‘한강의 기적’으로 일컬어지는 우리나라의 폭발적 경제발전을 이끈 방아쇠가 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출발은 순조롭지 못했다. 1967년 4월 박정희 대통령이 제6대 대선 공약으로 경부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내놓자 야당 정치인들은 일제히 반대했다. 착공 때는 아예 현장에 드러누웠다.

경제학자도 동참했다. 변 교수는 "자가용 가진 사람이 몇 명이나 된다고 농토를 가로질러 길을 낸단 말인가. 기어이 길을 닦아놓으면 소수의 부자가 그들의 젊은 처첩(妻妾)을 옆자리에 태우고 전국으로 놀러 다니는 유람로가 되지 않겠는가"라며 비판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는 포항제철 설립, 중화학공업 육성, 인천국제공항 건설 등 주요 국책사업마다 극력 반대의 선봉에 섰다. 초기 경제개발을 위해 필요한 외자도입과 대기업 육성을 망국의 길이라고도 했다.

변 교수는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시국선언에 앞장섰다가 4년 동안 해직됐다. 당시 그가 설립한 것이 자신의 아호 학현(學峴)을 딴 학현연구실이며, 이는 훗날 국내 좌파 경제학자들의 학문적 아지트인 학현학파가 된다. 학현학파는 서강학파, 조순학파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경제학파로 불린다.

<분배의 경제학> <반주류의 경제학> 같은 저서에서 보듯 그는 평등과 분배를 지향하는 경제학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를 인간 중심의 경제학이라고 칭했다.

인간 중심의 경제학이라는 그의 말은 그럴 듯한 선(善)으로 포장돼 있다. 하지만 시장경제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문재인 정부가 통치철학으로 내세운 ‘사람이 먼저다’, 김일성이 주체사상에서 선보인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구호와 닮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잘못된 방향으로 접어들었다면 뒤로 물러서는 것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는 첫 걸음이다. 그것이 진보(進步)다. 하지만 국내의 좌파 경제학자들은 시장경제가 아닌 이념을 추종하기 때문에 반성과 개선이라는 개념이 없다. 마차가 말을 끄는 격인 소득주도성장, 초격차를 스스로 팽개친 탈원전, 귀족노조의 천국이 된 노동시장은 이들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더 나은 성과를 위한 노력을 탐욕이라고 공격하고, 그 결과로 얻은 결실을 빈부격차 확대로 매도하는 상황에서 온전한 진보가 이뤄질 수 없다. 이는 옛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의 사회주의 실험 실패에서 입증된 지 오래다. 그들의 이념은 철 지난 썩은 과일이며, 이상향은 허공에 뜬 구름과 다르지 않다.

프랑스 사람들은 어스름한 황혼(黃昏)을 ‘개와 늑대의 시간’으로 표현한다. 내가 기르는 친근한 개와 나를 해칠 늑대를 구분할 수 없는 모호한 경계의 시간을 의미한다. 경제학은 한 나라의 경제가 망망대해를 항해할 때 필요한 나침반에 비유된다. 미래는 모호함으로 가득한 경계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경제학은 나를 지키는 친근한 개일 수 있지만 이념으로 왜곡된 경제학은 위험한 늑대다. 한국의 좌파 경제학자가 결코 진보가 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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