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가 해운사들의 한-동남아 항로 운임 담합에 대한 과징금을 부과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던 공정위와 해양수산부 간의 갈등이 공정위의 추가 제재 예고로 재점화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조성욱 공정위원장이 23개 국내·외 컨테이너 정기선사의 한-동남아 항로 해상운임 담합 제재와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는 모습. /연합
공정거래위원회가 해운사들의 한-동남아 항로 운임 담합에 대한 과징금을 부과하면서 일단락되는 듯했던 공정위와 해양수산부 간의 갈등이 공정위의 추가 제재 예고로 재점화되고 있다. 사진은 지난 18일 조성욱 공정위원장이 23개 국내·외 컨테이너 정기선사의 한-동남아 항로 해상운임 담합 제재와 관련해 브리핑하고 있는 모습. /연합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와 해양수산부(해수부)가 해운업계의 공동행위(담합) 제재 권한을 놓고 힘겨루기에 본격 돌입했다. 공정위가 운임 담합을 이유로 해운사에 대한 제재 수위를 높여가자 해수부는 공정위의 해운사 제제 권한을 빼앗는 ‘해운법 개정안’ 카드로 으름장을 놓고 있다. 기업간 담합을 처벌하는 공정위와 해운업 진흥에 업무의 방점이 찍힌 해수부의 이해가 정면 충돌한 것이다. 두 부처의 견해차가 크고, 조정 기능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애꿎은 해운기업들만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24일 해운업계에 따르면 공정위는 국내외 컨테이너 정기선사들이 한국-중국, 한국-일본 항로에서 운임을 담합한 정황을 포착하고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조사는 지난 18일 공정위가 한국-동남아 항로 해상운임 담합을 이유로 고려해운·흥아라인·장금상선 등 23개 국내외 해운사에 과징금 962억원을 부과한 결정의 후속조치다. 법 위반 내용이 한-동남아 항로 건과 같아 유사한 수준의 과징금 부과가 예상된다.

막대한 비용 부담에 직면한 해운업계는 극렬히 반발하고 있다. 해운법에서 허용한 공동행위를 공정위가 부당하게 제재하고 있다는 게 주장의 핵심이다. 실제 현행 해운법 29조에는 운임 등 운송조건에 관한 공동행위를 인정하고 있다. 자본력을 갖춘 거대 선사가 운임의 출혈 경쟁을 유발하면 중소선사는 괴멸할 수밖에 없는 업계 특성이 고려됐다.

특히 중소선사들은 공정위의 조사 착수 직후 의뢰한 유권해석에서 해수부가 해운법 위반이 아니라고 답한 사실에도 울분을 토로한다. 해수부만 믿고 있다가 경영난을 유발할 수준의 과징금 폭탄을 맞은 탓이다. 예컨대 흥아라인은 한-동남아 건으로만 2020년 영업이익(333억원)의 54%인 180억원의 과징금을 부과받았다. 한-중, 한-일 항로의 과징금이 더해지면 빚을 내서 물어야 할 판이다. 한국해운협회 관계자는 "업계의 공동행위는 해수부의 지도·감독과 해운법을 준수해 이뤄졌다"며 "정당성 회복을 위한 행정소송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현재 이 사안은 공정위와 해수부라는 정부기관 간의 갈등으로 번졌다. 해수부가 공정위의 행보를 월권으로 보고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양측 모두 해운법상 선사들의 공동행위는 인정한다. 다만 공정위는 공동행위 신고절차 미준수를 문제 삼고 있다. 한-동남아 노선을 예로 들면 선사들이 ‘최저운임(AMR)’ 협의와 ‘운임인상(RR)’ 협의 등 120회의 공동행위를 했지만 해수부에는 운임인상 협의 18회만 신고해 제재가 불가피하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이는 해수부 견해와 온도차가 크다. 해수부는 운임인상이 주된 공동행위고, 최저운임은 부수 협의인 만큼 최저운임의 신고는 필요 없다는 게 일관된 입장이다. 이를 잘 아는 공정위가 "해수부가 더 철저히 운임담합을 관리·감독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며 마치 해수부가 불법을 방임 중이라는 투의 발언까지 서슴지 않는 데 대해 불쾌한 기색이 역력하다. 해수부 관계자는 "해운법 주무부처인 우리도 요구한 적 없는 최저운임 신고를 공정위가 문제 삼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세계적으로도 최저운임 미신고를 이유로 정기선사를 처벌한 사례는 없다"고 말했다.

공정위와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으면서 해수부는 실력 행사에 돌입할 분위기다. 국회에 계류 중인 ‘해운법 개정안’의 조속한 추진을 통해서다. 이 법에는 해운사 공동행위에 공정거래법 적용을 원천 봉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만약 통과되면 해운업계에서 공정위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 또한 이미 제재 수준이 결정된 한-동남아 공동행위 건은 업계와의 행정소송을 통해 무력화시킬 계획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공정위는 해운법 개정안에 맞서 규제 권한을 지키기 위해 해수부와 실무협상을 벌여왔다. 해수부의 반발이 불 보듯 뻔한 상황에서 컨테이너 정기선사에 과징금 부과를 강행한 것 역시 협상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전략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공정위가 해운사 운임 공동행위에 제동을 건 것이 1980년 공정거래법 제정 이후 처음이라는 점에서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두 부처의 갈등 봉합, 행정소송, 개정안 처리 모두가 단기간 내 해결되기 어렵다는 데 있다. 해운사들의 경영 불확실성만 가중될 수밖에 없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두 부처의 법리해석 차이로 선사들이 부당 공동행위자로 낙인찍혀 피해를 보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며 "공정위는 부처간 이견 해소도 없이 섣불리 휘두른 칼에 기업들이 경쟁력을 잃고 도태될 수도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고 토로했다.

(왼쪽부터) 전국해상선원노동조합연맹 정태길 위원장, 한국해기사협회 이권희 회장, 한국해운협회 김영무 상근부회장이 지난해 9월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방침을 철회하라며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해운협회
(왼쪽부터) 전국해상선원노동조합연맹 정태길 위원장, 한국해기사협회 이권희 회장, 한국해운협회 김영무 상근부회장이 지난해 9월 청와대 앞 분수대 광장에서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방침을 철회하라며 릴레이 1인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국해운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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