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희
김인희

() 채수근 상병 사망사건을 조사하던 해병대 수사단장 박모 대령이 수사단장 자리에서 보직해임됐다. 죄명은 무려 집단항명 수괴. 명령과 복종이 우선인 군 내에서 집단으로 명령에 불복종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수사단장이 그 불복종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군 당국의 설명만 들으면 이는 군의 지휘체계와 기강을 뿌리부터 흔드는 일이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박 대령이야말로 군의 기강과 명예를 보존하기 위해 법과 원칙을 준수한 인물이다.

군에서 발생하는 문제의 대부분은 법과 원칙보다 상급자의 임의 지시가 더 큰 위력을 발휘할 때 나온다.

임의 지시로 인해 사고가 발생하면 그 지시를 내린 상급자는 "정식으로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지시를 받은 사람이 지시내용을 잘못 이해해서 그런 일이 발생했다"며 사고 책임을 회피하기 바쁘다. 반대로 임의 지시를 받은 하급자는 정식 명령서를 받은 적이 없으므로 상급자의 지휘책임을 따져묻기가 곤란하다.

사건 발생 초기부터 찬찬히 따져보자. 채 상병이 사망하자 해병대 사령부는 박 대령에게 이 사건과 관련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물론 정식 명령서가 발급됐고 이는 해병대의 명령서 발급 대장에 기록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박 대령은 이 명령서를 접수하고 조사를 진행한 뒤 지난달 30일 이종섭 국방부 장관과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조사결과를 보고했다. 이 장관은 이 보고서에 직접 서명하며 경찰 이첩을 명령했다.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31일 이 장관은 우즈베키스탄 출장을 앞두고 해병대 지휘부에 이첩을 대기할 것을 지시했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은 이러한 지시를 박 대령에게 전달했으나 박 대령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경찰에 조사결과를 이첩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일단 이 장관과 김 사령관의 지시는 임의 지시인 데다가 절차를 위반하라는 불법 지시에 해당한다. 사건을 이첩하지 말라는 정식 명령서가 없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만약 조사 결과를 이첩하지 말라는 정식 명령서를 발급했다면 해병대 사령관이 규정 위반으로 책임을 져야 할 판이다. , 박 대령이 최종으로 접수한 정식 명령은 사건을 조사하고 조사내용에 대해 국방부장관의 결재를 받은 뒤 경찰로 이첩하라는 내용이다. 박 대령은 이 명령을 충실히 이행했을 뿐이고 경찰로 사건을 이첩하지 말라는 정식 명령을 받은 적이 없다.

거기에 난데없이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끼어들었다. 절차대로 경찰에 조사결과를 이첩한 것인데 이를 도로 회수하며 해병대 사령관과 박 대령에게 수 차례 전화를 걸어 이첩하지 말라는 압박을 가했다. 게다가 국방부 법무관리관은 직제상으로 해병대 사령관의 상관도 아니다. 해병대 사령관과 수사단장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치가 아닌 것이다.

규정과 절차를 위반하라는 불법적 지시를 무시하고 원래의 합법적 명령을 충실하게 따른 것, 명령권자가 아닌 사람의 임의 지시를 거부한 것은 절대 항명이 될 수 없다. 오히려 박 대령은 부당한 압박에 굴하지 않고 규정을 준수한 모범 군인의 사례로 남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국방부는 조사결과의 경찰 이첩을 기를 쓰고 막으려 했을까. 사건의 책임을 은폐하고 축소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물론 국방부는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런 변명은 대한민국의 1800만 군필자를 개돼지 취급하는 것임을 모를리가 없다.

이런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군 고위 장교들에게 묻고 싶다. 사관생도 시절의 신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는가. 박 대령은 우리는 안일한 불의의 길보다 험난한 정의의 길을 택한다는 신조를 여전히 훌륭하게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이 신조를 잊지 않았다면 박 대령에 대한 부당한 탄압을 당장 멈추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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