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
이호선

일면식도 없는 자로부터 습격을 받아 중태에 빠졌던 신림동 둘레길 성폭행 시도 사건의 30대 피해여성이 끝내 숨졌다. 가해자는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하고 준비, 대담하게도 백주 대낮에 잔혹한 범죄를 저질렀다. 불과 얼마 전의 신림역 칼부림 사건, 분당 서현역 무차별 살인사건의 충격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일어난 사건이다. 이번 사건을 보면서 국가의 본질적 책무, 응보적 정의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성경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사건, 질투로 동생을 죽인 카인에 대해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피살자는 그저 그의 피로 억울함을 호소할 뿐이다. 이걸 하늘이 듣는다는 건, 국가가 들어야 한다는 말과도 같다. 국가는 이 땅에서 하늘의 공의를 그나마 대신하도록 하는 존재로 인간이 합의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가해자의 인권과 피해자의 인권이 같을 수 없다. 다른 만큼 보호의 우선순위도 다를 수밖에 없다. 억울하게 피흘리고 희생된 피해자의 인권이 첫 번째이고, 가해자의 인권은 두 번째다. 가해자는 국가사법절차를 통해 변명할 기회라도 있지만, 피해자의 절규는 피가 전부다. 만일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국가는 피해자의 인권을 택해야 한다.

피해자 인권 중에서 응보적 정의에 대한 충족을 빼놓을 수 없다. 응보적 정의는 원시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 본연의 것이고, 고유의 권리다. 국가가 이를 빼앗아 응보적 정의를 무시한다면 그건 구성원의 상식을 모독하는 것이다.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거론하지만, 누가봐도 명백하게 의도된 잔혹한 살인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의 피값에는 어림도 없다.

국가가 사법살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이 사형폐지론자들의 주장이다. 그러나 국가가 무고한 피해자의 생명을 살인적 충동을 거침없이 표출한 가해자의 그것보다 가볍다고 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오만함이 아닐까. 누가 그런 판단 권한을 주었나. 어설픈 가해자 인권타령이 정의를 불구화하고, 공동체를 병들게 한다는 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필요한 때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말하듯 ‘권리와 법률은 전염병이나 다름없이 되고, 이성은 사기꾼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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