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원근
송원근

현대 현대 법치주의 국가에서 사적 복수는 불법이다. ‘부모를 죽인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았다’는 통렬한 복수는 무협드라마에서나 나오는 얘기다. 현대 사회에선 사적 복수를 결행한 사람에게 똑같이 법의 형벌이 따른다. 무엇보다 흉악범들은 범행 직후 공권력이 보호해주니 어찌해볼 도리 자체가 없다.

미국 드라마 ‘프리즌 브레이크’ 주인공은 친형을 감옥에서 탈출시키기 위해 일부러 형이 수용된 교도소에 수감될 수 있는 범죄를 저질러 기어이 작전에 성공하지만, 현실에서 원수를 갚기 위해 그놈이 수감돼 있는 교도소를 찾아 들어간다는 건 일어나지 못하는 일이다. 흉악범에 당한 희생자들은 이미 죽었으니 말이 없고, 그 유가족과 지인들은 그놈이 무기징역 또는 가석방 없는 종신형에 처해져 영원히 사회와 격리되는 것밖에 기대할 수 없다. 사회와 격리? 그것이 사적 복수를 못하게 하는 현대국가에게 개인이 위임한 공적 복수로 충분한 것인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한동훈 법무장관에 이어 23일 한덕수 총리도 "가석방을 허용하지 않는 무기형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필자가 묻는 것은 ‘흉악범죄를 어떻게 예방할 것인가’가 아니라 피해자와 유족들을 대신해 그놈에게 어떻게 복수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테러범들은 하루 세 번 식사할 때마다 밥이 맛있다고 느낄 것이다. 그 역시 달콤한 잠에 빠질 것이며, 때로는 싱그러운 가을 향기가 문득 어제와는 다를 것이라고 느낄 것이다. 하얀 눈이 내리면 그 백색 세상을 즐길 것이며, 때로는 교도소에서 몰래 구한 성인잡지를 보고 흥분을 느낄지도 모른다. 가장 더러운 상상은, 상상에 그치길 바라지만, 그놈이 범행 당시를 계속 추억하면서 그 장면을 죽을 때까지 즐길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때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시도해봤으면 어땠을까라는 악마적 상상에 빠질지도 모른다.

사형이 범죄예방 효과가 있는가 없는가란 논쟁은 너무 한가하다. 그리고 극도로 방관자적이다. ‘이미 한 사람이 죽었으니 나라도 어떻게 그런 테러를 벗어나볼까’라는 이기심의 발로로밖에 안 보인다. 우리는 문제설정을 달리 해야 한다. 범죄예방 효과를 논하는 건 산 사람을 위한 것이지 희생당한 사람과 그 유가족들을 위한 논의가 아니다. 우리는 희생당한 사람과 유가족들의 원통함과 분노를 어떻게 풀어주는 게 옳은가란 주제로 토론을 해야 한다. 그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슴에 장착해야 할 바른 자세다.

대형사고가 터졌을 때 책임자를 문책하고 처벌하는 건 형법이 그렇게 정해놔서이기 전에 먼저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혀야 하기 때문이다. 다수가 분노하면 대응해야 하고 테러 희생자 유가족 한두 사람 정도이니 그런 소수의 분노는 그냥 무시해도 된다는 건 정의가 아니다.

단순히 사형제를 부활하자는 얘기로 그쳐선 안 된다. 우리는 살인 현장에 있지 않았기에 그 살인 행위가 얼마나 야만적이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경찰조차 모른다. 그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해 사인이 뭔지 정도만 알 뿐이다. 어떻게 피해자를 죽였는지 오로지 흉악범의 진술에만 의존한다. 그놈 외에는 아무도 그 현장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알지 못한다. 피해자가 느낀 공포와 고통이 얼마나 컸는지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국가의 이름으로 흉악범에게 마땅한 보복을 해야 한다. 범죄 예방책 이전에 이 보복책부터 세우는 게 피해자와 유족에 대한 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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