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영
정구영

세계 어느 곳을 가든 사이좋은 이웃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유는 간단하다. 지리적으로 붙어 있어 충돌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실제 세계 역사를 보면 전쟁의 90%는 국경을 맞댄 나라 사이에서 벌어졌다.

우리나라 역시 바다 건너의 일본과 싸운 임진왜란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중국과의 전쟁이었다. 몽골과 청나라도 중국이냐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중국은 자국 영토에 있었던 모든 나라의 역사를 중국사로 간주하고 있다. 천년의 적(敵)이란 말이 나온 배경이다.

그럼에도 한국인에게는 반중(反中)보다 반일(反日) 구호가 압도적일 만큼 익숙하다. 이는 36년 동안의 식민지 경험이 씻을 수 없는 국치(國恥)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역사와 영토 문제가 양보할 수 없는 성역(聖域)으로 존재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표(票)를 먹고 사는 정치인은 더욱 그렇다. 식민지배는 불법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일본 정치인은 드물다. 물론 독도는 일본 땅이라고 말할 국내 정치인도 없다. 오히려 국민 정서를 외교에 끌어들이기 일쑤다. 이는 좌우(左右)의 구분도 없다. 2012년 8월 우리나라 대통령으로서는 처음으로 독도를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이 대표적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독도 정책 기조는 조용한 외교였다. 독도를 실효 지배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원하는 분쟁지역으로 만들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에 정치적 궁지 탈출을 위한 국면 전환용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는 이유다.

6.25 전쟁 이후 한일관계는 지정학적 안보·경협이라는 구심력과 식민지배·반일감정이라는 원심력 사이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이어왔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반일 노선을 걸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국교 정상화를 통해 미래지향적 한일관계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한일관계는 여전히 ‘가깝고도 먼 나라’라는 주술에 갇혀 있다. 1969년 김일성이 내놓은 갓끈전술의 망령 탓이다. 갓끈전술은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개의 갓끈에 의해 남한이 유지되고 있는데, 이 중 하나만 잘라내면 머리에서 갓이 날아가듯 무너진다는 것이 골자다. 2000년대 중반 이후 반미운동의 효과가 시들해지면서 갓끈전술은 상대적으로 약한 갓끈인 한일관계에 집중되고 있다.

과거로 인해 현재의 이익이 저해된다면 과거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일까. 국제정세와 역학관계의 본질을 고려하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좌파 진영에서 전가의 보도처럼 써먹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은 이념으로 범벅된 레토릭이다. 역사를 잊으면 안되지만 과거의 치욕만 들추는 것은 전술 또는 공작일 뿐이다. 외교에 있어 100% 승리란 있을 수 없다.

우리나라와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지향한다. 북한, 중국, 러시아라는 공동의 적도 있다. 갓끈전술은 물론 반일 선동 가요인 죽창가(竹槍歌)를 앞세운 80년대 운동권 놀이도 결국은 이 같은 구도를 무너뜨리기 위한 노림수라고 할 수 있다.

세계는 지금 주요 7개국(G7)이 게임의 규칙을 정한다. 19세기로 치면 열강(列强) 클럽이다. 세계 최강의 미국이 이끌고, G7의 핵심 멤버인 일본이 지원하는 한미일 삼각동맹은 우리나라가 최대 수혜자이자 열강 클럽 진입을 위한 입장권과 다름없다. 윤석열 대통령이 정치적 불이익과 부담을 무릅쓰고 한일관계 격상과 안정화에 승부수를 던진 것은 복잡하게 꼬인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한 칼에 베어낸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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