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전의 일이다. 이 해에 시인 김춘수는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란 시를 발표했다.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東歐)의 첫겨울/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쏘련제 탄환은/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너는 열 세 살이라고 그랬다. (중략) 자유(自由)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한밤에 불면의 염염한 꽃을 피운다./부다페스트의 소녀(少女)여.

이 시는 1970년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렸다. 시인은 1956년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소련군의 총에 맞아 쓰러진 13세 소녀의 신문 기사 사진을 모티브로 하여 이 시를 썼다. 당시 헝가리에서 반(反)소련 민주화 운동이 격렬하게 전개됐다.

헝가리보다 11년이나 앞선 소련공산당 반대 운동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이름도 없던 시기에 우리 땅에서 있었다. 1945년 11월 23일의 ‘신의주반공학생의거’다. 신의주반공학생의거는 2차대전 종전 이후 세계 최초 반소(反蘇) 운동이다. 이 사건은 1950~60년대 폴란드·헝가리, 그리고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까지 영향을 미쳤다. 당시 38선 이북 지역을 점령한 소련군은 전투기를 동원해 15세~18세의 신의주 중학생 시위대를 향해 기관총을 발사했다. 신의주 동중학교·사범학교·제1공업중·제2공업중 등 시위학생 23명이 현장에서 희생됐다. 350 명이 부상당했고, 200여 명이 체포돼 시베리아 유형(流刑)으로 생을 마감했다.

23일 서울 중구 남산의 자유총연맹에서 신의주반공학생의거 78주년 기념 세미나가 열렸다. 신의주학생의거 기념식은 1973년까지 정부가 매년 개최해오다 이후 민간으로 넘어가면서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날 조형곤 한국미래회의 사무총장은 여기저기 흩어진 사료들을 발굴해 신의주학생의거 희생자 23명 전체 명단을 최초로 공개했다.

신의주학생의거는 78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한 ‘현재성’을 갖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북한 지역에 여전히 공산전체주의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 지역에 자유와 평등·인권·민주주의·법치가 실현되기 전까지 신의주학생의거를 ‘과거완료형’으로 역사 속에 묻어버리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지금 신의주학생의거를 다시 돌아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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