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필섭
공필섭

얼마전 윤석열 대통령이 영국을 국빈 방문했다. 버킹엄궁 오찬에서 국왕 찰스 3세는 첨단기술·방산·문화·예술 등 우리나라의 핵심역량을 언급하며 우리 국민의 저력을 극찬했다.

1950년 전후 아시아 변방 최빈국에서 지금은 G7과 NATO의 중요한 초청국으로 세계적인 강국으로 변모한 대한민국. 그 대표자가 영국 왕실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니 감회가 남다르다.

윤석열 대통령은 선물로 위스키 하나를 받았다. 2008년 찰스 3세가 라프로익(Laphroaig) 증류소를 방문해 직접 서명한 오크통의 라프로익 15년 한정판이다. 라가불린, 아드벡과 더불어 피트 3대장으로 불리며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애정했던 몰트 중 하나이기도 하다. 1994년 찰스 3세가 라프로익 증류소를 처음 방문했을 때 그 맛에 반해 왕실보증서를 수여한 일화 또한 유명하다.

라프로익 15년은 포르말린 향의 강한 피트가 휘몰아치며 얼굴을 찌푸리게 만든다. 하지만 곧 달콤한 캐러멜 맛과 바다 내음 가득한 장작향에 함박미소가 지어진다. 참으로 이중적인 매력이 아닐 수 없다.

환영 오찬에서 찰스 3세는 윤동주의 시 ‘바람이 불어’ 한 구절을 영어로 읊었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격변하는 시대 속에 소극적인 스스로를 부끄러워한다는 의미지만, 영국 국왕은 엄청나게 빠른 변화 속에서도 스스로가 굳건한 한국의 모습으로 부연했다. 서로 상반되는 시의 풍미가 라프로익의 두 얼굴과 참으로 닮았다.

라프로익 한잔 들고 그윽한 스모키향에 취해 윤동주 선생이 섰던 그 자리에 올라서 본다. 그리고 나약했지만 이제는 나약하지 않을 한 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또 다른 스스로를 꿈꾸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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