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동식
주동식

2019년 12월 첫 번째 수요일 오전 11시쯤이었다. 몇몇 우파 활동가들이 지하철 3호선 안국역 근처 연합뉴스로 가는 길목에 모였다. 열 명 남짓한 그들 가운데 필자도 있었다. 날씨는 왜 그리 추운지 몸이 떨렸다. 하지만 거대한 벽에 도전한다는 막막한 공포심이 더 몸을 떨게 했던 것 같다.

우리가 모인 것은 위안부 소녀상 때문이었다. 멀지 않은 일본대사관 앞에서 진행되는 소녀상 집회에 대한 비판과 반대가 목표였다. 처음에는 모임의 이름도 없었지만 매주 집회가 진행되면서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그 이름은 필자가 제안해 받아들여졌다.

예상처럼 대책위 활동은 격렬한 반발에 직면했다. 시민들의 시선은 싸늘했고 어디선가 몰려온 소녀상 지지 활동가들이 욕을 했다. 심지어 <반일종족주의> 공동저자 중 한 사람인 이우연 박사에게는 폭력까지 휘둘렀다. 막장 행각으로 유명한 ‘서울의 소리’ 백은종은 대책위가 식사하는 곳까지 카메라를 들고 쫓아와 "매국노들"이라고 욕했다. 길거리에서 필자를 가로막고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행패는 오래 가지 못했다. 필자는 다음해 총선에 출마하느라 광주에 내려가는 바람에 집회에 계속 참석하지 못했지만, 소녀상 집회가 추락하고 있다는 소식은 전해들었다. 이용수씨의 윤미향 저격이 결정타였지만, 대책위 동지들의 활동이 아니었다면 그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실감한 것은 우리나라 반일 활동과 논리가 얼마나 빈약한가 하는 점이었다. 대책위 동지들은 10여 년 이상 싸울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정작 소녀상 집회를 주도하던 진영이 자폭한 셈이었다. 사실 소녀상 논리 자체가 일본 좌파 학자들의 이론에 기댄 것이었다. 반일 활동의 논거가 일본 학자들이라는 아이러니라니. 심지어 ‘정신대’ 용어를 위안부로 오해한 때문에 단체 이름이 바뀌기도 했다.

그런 한계를 뛰어넘어 한국 학자가 제대로 위안부 문제를 집대성한 서적이 등장했다. 주익종 박사가 펴낸 <일본군 위안부 인사이드 아웃>(이승만북스)이 주인공이다. 1991년 이후 거대한 사기극으로 일관한 위안부 문제가 32년 만에 제대로 조명을 받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민간의 공창제를 기반으로 성립됐다는 것, 이미 작동 중인 시장 네트워크를 통해 위안부를 모집했다는 것, 총독부나 일본군 관헌에 의해 위안부가 강제 연행됐다는 통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밝힌다. 또 위안소는 중국·동남아·남양군도 등 전장터에 설치되는 것이었고, 만주·일본·조선·대만 등에서 일본군은 부대 인근의 민간 접객업소를 이용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지금까지 위안부로 알려진 여인들의 약 3분의 1은 이런 접객업소에서 일했던 경우라고 한다.

중국·동남아·남양군도 등에서 위안부로 일하려면 거주지 경찰서장의 신분증명서를 받아야 했다. 여성과 친권자의 위안부 취업 허가 신청서, 친권자의 승낙서, 호적등본, 인감증명 등 서류가 필요했다. 이는 위안부 모집이 강제연행이 아니며 위안부와 업주와의 관계가 계약에 근거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위안부 문제에 접근할 때 가장 저지르기 쉬운 오류가 일본군이 위안소를 설치한 의도를 오해하는 것이다. 악마 일본이 순결한 조선 처녀들을 능욕하려는 의도였다는 전제를 까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하지만 잠수함을 설계해 제작하고 항공모함을 만든 시스템은 법치 없이는 작동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선진국가 일본이 시장을 통해 얼마든지 위안부를 공급받을 수 있는데 온갖 반발을 무릅쓰고 처녀들을 납치하고 겁탈할 이유가 없다. 애초에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이유 자체가 군인들의 성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주익종 박사의 책이 만연한 오해를 씻어내는 결정타가 될 것으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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