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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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행(BOJ)이 경기부양을 위해 추진중인 대규모 금융완화 정책을 유지하기로 했다. 마이너스 금리 해제를 위한 제반 여건이 아직 충족되지 않았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일본은행이 ‘인내심 있는 금융완화’를 재차 강조하면서 피봇, 즉 통화정책 전환 기대감에 최근 꿈틀거렸던 엔화가치도 하락세로 방향을 틀었다. 시장에서는 마이너스 금리 해제 시기로 내년 4월을 유력하게 보는 분위기다.

일본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이너스 금리를 운용하고 있는 나라다. 미국과 유럽 등 주요국은 코로나19 당시 살포한 돈 때문에 물가가 치솟자 금리를 올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인플레이션보다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을 동반한 경기침체) 탈출이 목표인 일본은 다른 길을 걸었다. 아베노믹스가 한창이던 2016년 2월 단기 정책금리를 연 -0.1%로 내리고, 장기 정책금리는 상한을 묶어 경제와 물가를 살리는 금융완화 정책을 이어온 것이다.

내년 글로벌 금융시장의 최대 관심사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어느 정도의 속도로, 얼마 만큼 기준금리를 내릴 것인지 여부다. 하지만 일본이 마이너스 금리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에 못지않은 파급효과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일본은행의 피봇으로 일본 국채금리와 엔화값이 빠르게 오를 경우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의 일본 회귀, 그리고 이에 따른 ‘투자자금 대이동’으로 글로벌 금융시장에 미칠 영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상대적으로 낮은 엔화를 빌려 금리가 높은 다른 나라의 통화나 자산 등에 투자해 이익을 얻는 금융기법이다. 이를 활용하면 일본에서 적용하는 금리와 다른 나라의 금리 차이 만큼 수익을 얻게 되며, 차입금의 금리가 낮기 때문에 이자를 지급하더라도 비교적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2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일본은행은 지난 18~19일 열린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단기 정책금리를 -0.1%로 동결했다. 무제한 국채 매입을 통해 10년물 국채금리 변동폭 상한을 1%로 유지하는 수익률곡선제어(YCC) 정책도 유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일본은행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 10월까지 19개월 연속으로 목표치인 2%를 웃돌고 있지만 임금 상승을 동반하는 물가안정 목표 달성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며 "금융완화를 인내심 있게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최근 일본의 물가 상승은 에너지 및 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른 일시적 현상일 뿐이며, 일본은행이 목표로 하는 임금 상승을 동반한 물가안정과는 거리가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당초 시장에서는 일본은행이 이번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마이너스 금리 해제에 나설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의 물가 상승률이 2%대 후반을 이어가며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일본은행 역시 통화정책 정상화를 모색할 것이란 관측에 따른 것이다.

우에다 가즈오(植田和男) 총재도 시장의 기대감에 불을 붙였다. 그는 지난 7일 참의원 재정금융위원회에 출석해 "임금 인상과 물가 상승의 선순환이 확실해진다면 마이너스 금리 해제와 장·단기 금리조작 개선도 시야에 넣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로 인해 지난달 달러당 152엔 턱밑까지 올랐던 엔·달러 환율이 141엔까지 떨어지는 등 엔화가치가 급등했다.

일본은행이 당장 마이너스 금리를 해제하지는 않았지만 내년에 정책이 수정될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국과 일본 간 금리 격차로 엔화가치가 하락하고, 수입물가가 오르는 등 금융완화에 따른 부작용이 심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최근 "반세기 동안 지속된 초저금리 정책이 위기 회피에는 효과적이었을지 몰라도 정부와 기업의 개혁을 지연시킨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일본 경제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금리가 존재하는 세계’로의 회귀는 피할 수 없다"고 보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장에서는 내년 4월, 늦어도 7월에는 마이너스 금리가 해제될 것으로 점치고 있다.

일본은 해외투자를 가장 많이 하는 나라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일본의 해외투자 자금은 3조2730억 달러(약 4320조원)에 달한다. 이 때문에 일본의 금리가 오르고, 엔화가 강세로 돌아서면 엔 캐리 트레이드 자금의 일본 회귀로 글로벌 금융시장도 타격을 받을 공산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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