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와 대만이 이끌고 있던 세계 반도체 산업 지형이 보조금을 앞세운 각국 정부의 참전으로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만 TSMC와 소니, 토요타, 덴소 등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 세 곳이 설립한 파운드리 합작사 JASM의 구마모토현 제1공장 전경. /연합
우리나라와 대만이 이끌고 있던 세계 반도체 산업 지형이 보조금을 앞세운 각국 정부의 참전으로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대만 TSMC와 소니, 토요타, 덴소 등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 세 곳이 설립한 파운드리 합작사 JASM의 구마모토현 제1공장 전경. /연합

우리나라를 비롯해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세계 주요국의 반도체 경쟁이 날로 격화하고 있다. 거액의 정부 보조금을 주는 조건으로 첨단 반도체 기업의 생산설비를 자국에 유치하는 움직임이 점점 거세지고 있는 것. 과거 이 같은 방식의 정부 보조금 지원책은 자유무역 질서를 해치는 ‘반칙’으로 간주됐다. 하지만 기업 간 주도권 싸움에 그치던 반도체 경쟁이 이제는 국가 대항전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만큼 보조금을 통한 첨단 반도체 기업 유치는 점차 ‘뉴노멀(새로운 표준)’이 돼가는 모습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우리 정부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대만이 이끌고 있던 세계 반도체 산업 지형이 보조금을 앞세운 각국 정부의 참전으로 서서히 변화의 기미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보조금 없이 세액공제 중심의 반도체 투자 지원 정책을 펴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도 반도체 보조금 도입을 신중하게 검토해 봐야 한다는 의견이 정부 안팎에서 강하게 일고 있다.

24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국가 간 보조금 전쟁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국가는 미국이다. 미국은 지난 2021년 조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글로벌 반도체 산업 지형을 자국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는 지난 2022년 ‘반도체와 과학법’을 제정했다. 자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는 기업에 생산 보조금 390억 달러, 연구개발(R&D) 지원금 132억 달러 등 5년간 527억 달러(약 70조 5000억 원) 상당의 정부 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 골자다.

다만 미국 정부의 반도체 보조금을 받은 기업은 중국 내 반도체 생산설비를 업그레이드하거나 확장하는 데 제한을 받는다. 이를 어길 경우 반도체 보조금 전액을 반환해야 한다. 반도체와 과학법을 통해 미국은 글로벌 기업들의 자국 투자를 유도, 자국 경기 활성화를 기대할 수 있음과 동시에 경쟁 상대국인 중국을 첨단 반도체 공급망에서 배제하는 전략적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최근 미국은 반도체와 과학법의 첫 번째 보조금 지급 대상 기업으로 자국 종합 반도체 기업인 인텔에 195억 달러(약 26조 원)를 지원한다고 밝혔다. 이는 개별 기업이 받는 혜택으로는 가장 큰 규모다. 인텔 다음으로 미국 내 가장 많은 투자를 하고 있는 TSMC와 삼성전자는 각각 50억, 60억 달러 수준의 보조금을 받을 것으로 업계는 추산하고 있다.

과거 반도체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되찾겠다는 일본 역시 조(兆) 단위 보조금을 바탕으로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을 유인하고 있다. 지난달 24일 TSMC와 소니, 토요타, 덴소 등 일본을 대표하는 대기업 세 곳이 만든 파운드리 합작사 JASM의 구마모토현 제1공장 준공이 대표적이다. 일본은 JASM 제1공장 설비투자액의 절반 가까운 최대 4760억 엔(약 4조 2000억 원)의 보조금을 TSMC에 제공하기로 했다.

또한 일본은 2027년 말 가동을 목표로 구마모토현에 건설 예정인 제2공장 역시 약 7300억 엔을 지원할 계획이다. 두 공장에만 10조 원이 넘는 일본 정부의 보조금이 투입되는 것이다.

EU도 지난해 9월 반도체 법을 제정하며 보조금 경쟁에 가세했다. EU의 반도체 법은 현재 약 10%인 글로벌 반도체 시장 점유율을 오는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특히 33억 유로에 달하는 예산과 민간 투자금을 포함해 모두 430억 유로(약 62조 3000억 원)를 반도체 보조금 예산으로 편성한다는 구상이다. 중국 역시 국가 주도 반도체 산업 육성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중국은 시진핑(習近平) 주석 집권 이래 10∼30%에 불과한 반도체 자급률을 오는 2025년까지 70%까지 높이는 것을 목표로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고 있다.

국내 반도체업계에선 정부의 보조금 편성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반도체·2차전지 등 첨단산업 분야의 주도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속도전’이 생명인데, 자칫 국내 기업들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하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기업은 오는 2047년까지 경기 남부 ‘반도체 메가 클러스터’ 구축에 622조 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특히 삼성전자는 이 가운데 500조 원을 책임진다. 하지만 세액공제 비율(대기업 기준)을 기존 8%에서 25%로 높인 것 외엔 이렇다 할 정부 지원은 없는 실정이다. 이마저도 10%는 올해까지만 한시적으로 적용되는 만큼 내년부터 세액공제 규모는 15%로 줄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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