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남공작 70년사] 일본인으로 둔갑한 신광수

장 기간 행불되더라도 찾을 사람 없는 45-50세 일본인 남자 물색 작업 착수
중국 음식점 요리사인 '하라다다아키' 온갖 감언이설로 꾀어서 납치후 북송
신, '하라다다아키'로 완벽하게 변신후 합법적으로 일본 마음대로 드나들어
김정일로부터 "대남침투 공작전개" 등 두번째 직접 지시 받고 다시 日 침투

일본에 침투한 공작원 신광수가 일본을 거점으로 위장해 활동했다. 1980년 6월(소화55년) 무연고의 일본인을 납치했다. 신분 변신을 하려고 조총련 간부를 협박해 찾아낸 일본인 대상자 하라 다다아키였다. 사진은 신광수가 다다아키와 함께 공작선을 타고 북한으로 복귀한 미야자키 아오지만 해변.
일본에 침투한 공작원 신광수가 일본을 거점으로 위장해 활동했다. 1980년 6월(소화55년) 무연고의 일본인을 납치했다. 신분 변신을 하려고 조총련 간부를 협박해 찾아낸 일본인 대상자 하라 다다아키였다. 사진은 신광수가 다다아키와 함께 공작선을 타고 북한으로 복귀한 미야자키 아오지만 해변.

일본에 침투한 신광수는 1차 침투시 포섭했던 조총련계 재일교포 은정웅의 주선으로 도쿄에 거처를 잡은 다음 조총련 오사카 상공회 회장 이길병(73세)에게 접근했다. 그리고 북한에 살고 있는 아들 2명의 사진과 자필편지를 제시하면서 만약 협조하지 않으면 아들들의 신상이 해롭게 된다고 협박하여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이길병과 예전에 포섭한 김길욱에게 북한에서 계획한 대로 납치대상을 물색해 보고할 것을 지시하였다.

신광수가 정해준 납치대상의 기준은 미혼이면서 연고가족이 없는 남자, 여권을 한번도 발급받지 않아 관공서에 인물사진을 제출한 적이 없으며 전과기록도 없고 지문날인한 사실도 없는 자, 개인부채 등 금전거래는 물론 은행거래가 없는 대상이었다. 말하자면 장기간 행방불명되더라도 찾을 사람이 없고 노출될 위험이 없는 45~50세 일본인 남자를 물색하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개월이 지난 1980.6월 신광수는 이길병으로부터 기준에 부합하는 납치대상을 물색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납치대상은 조총련 오사카 상공회 이사장 이삼준이 운영하는 중국음식점에서 요리사로 일하고 있는 ‘하라다다아키’(당시 44세)라는 일본인이었다.

신광수는 이길병, 이삼준 등과 모의해 해안가 별장으로 휴가가자는 구실로 하라다다아키를 미야자키현 아오지마 해안까지 유인하기로 한 다음 북한 공작지도부에 무전연락을 통해 계획을 보고하였다. 북한 공작지도부에서는 신광수와 접선일시와 장소를 정하고 공작선을 대기시키기로 약속하였다.

이렇게 납치준비를 끝낸 신광수는 1980.6월 중순 이길병, 이준삼, 김길욱 등과 합세해 하라다다아키에게 좋은 직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며 바닷가로 놀러가자고 유인해 그를 미야자키현 아오지마 해수욕장 어린이놀이터 남쪽끝 도랑으로 유인하여 술을 먹였다.

그곳에는 북한에서 보낸 4명의 납치범이 이미 대기하고 있었다. 신광수는 납치범 4명과 하라다다아키의 입을 틀어막고 손발을 묶은 뒤 자루에 넣어 대기하고 있던 고무보트에 실었다. 그런 다음 공해상에 대기하던 공작선에 옮겨싣고 자신도 그와 함께 북한으로 복귀하였다.

납치한 하라다다아키와 함께 북한으로 복귀한 신광수는 평양 근교 초대소에 5개월간 체류하면서 김정일 지시대로 하라다다아키의 구체적인 인적사항은 물론 그의 학경력, 가족 및 친척관계, 거주지 이동 관계, 금전관계 등을 면밀히 파악하여 숙지하였다. 하라다다아키가 중국음식점 요리사였던 점을 감안해 중국 요리기술까지 익혔다. 이렇게해서 완벽하게 ‘하라다다아키’라는 일본인으로 둔갑하였다.

1980년 11월 말 대남공작부서인 노동당 조사부 부부장 강해룡으로부터 ‘상당히 힘들게 해결한 합법신분이니 위장신분을 더욱 공고히 하고 완벽한 일본인으로 행세하면서 재일공작을 더욱 강화하라’는 지시와 격려를 받은 후 세 번째로 일본에 침투하게 되었다. 참고로 조사부 부부장 강해룡은 신상옥, 최은희씨 납치를 지휘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번에도 예전처럼 남포항에서 공작선을 타고 출발했는데, 침투지역은 하라다다아키를 납치했던 아오지마 해안이었다.

아오지마 해안을 통해 일본에 침투한 신광수는 먼저 하라다다아키 납치에 가담한 이길병, 김길욱, 이삼준 등을 만아 ‘당신들은 하라다다아키 납치공작에 직접 가담한 장본인들로서 책임이 크니 비밀을 철저히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도쿄에 거주하는 민단간부 이동철을 포섭하라는 북한지시에 따라 그에게 접근하였다. 그런 후 북한에 살고 있는 숙부 이승규의 사진과 자필편지를 보여주는 한편 이동철이 대학재학 시 북한의 장학금을 받은 사실 등을 미끼로 약점을 공략해 포섭하였으며 사업자금으로 일화 3천만엔을 지원하도록 협박과 회유를 병행하였다.

조총련을 비롯, 일본에 침투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일본 전역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들의 납치당시 장소와 연도, 성명들이 적혀있다.
조총련을 비롯, 일본에 침투한 북한 공작원들에 의해 일본 전역에서 북한으로 납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인들의 납치당시 장소와 연도, 성명이 적혀있다.

1981년에 들어와서는 일본인으로 둔갑하기 위한 각종 신분증과 서류를 갖추는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를 위해 먼저 1981.5월 이길병의 소개로 일본당국의 각종 신분증 발행절차와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방원정(50세)을 접촉해 재북중인 처남 김봉기의 편의를 잘 보장해주고 사업자금도 적극 지원하겠다고 회유하는 수법으로 그를 포섭하였다. 그런 후 방원정에게 부탁해 하라다다아키의 명의로 된 여권, 운전면허증, 인감등록증, 국민건강보험증 등을 발급받도록 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발급하는 신분증까지 모두 갖춘 ‘완벽한 일본인’으로 둔갑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후 1982.2월에는 포섭한 방원정을 데리고 동경 제국호텔로 가 북한 무역대표단 일원으로 위장해 공작검열차 일본을 방문한 노동당 조사부 부부장 강해룡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강해룡은 방원정에게 ‘민단으로 위장전향하여 남한 입국 여건을 조성하는 동시에 남한에 사는 동향인, 동창, 친척들 가운데 영향력 있는 자를 포섭’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1982년 3월 북한 공작지도부의 소환지시를 받은 신광수는 이번에는 하라다다아키 명의로 된 여권을 소지하고 합법적으로 여객기를 이용해 스위스, 파리, 모스크바 등을 거쳐 북한으로 복귀하였다.

이때부터 신광수는 과거처럼 몰래 북한공작선을 타고 일본해안으로 침투하거나 복귀하지 않고 일본인의 합법적인 신분을 이용해 공개 합법적으로 일본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된 것이다.

북한에 들어가서는 초대소에 체류하면서 정치사상학습 등 사상교육을 받고 김일성 생일 70주년 축하행사에 참가해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받은 후 두 번재로 김정일로부터 직접 공작임무를 부여받았다.

김정일은 신광수에게 ‘일본인의 합법적인 신분을 활용해 동남아 거점을 조속히 확보’하고 일본인 납치사실이 노출되면 국제문제로 비화될 것이니 관련 비밀을 철저히 지킬 것과 재일 하부망을 활용해 대남침투 공작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1982년 5월 초 평양을 출발해 모스크바, 파리, 스위스 등 역순으로 일본에 다시 침투한 신광수는 이전에 포섭한 이동철을 만나 무전기를 넘겨주고 작동법과 암호해독 교육을 실시하는 등 그가 독자적으로 북한과 연계연락을 가지면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울러 그에게 민단의 신임을 획득해 중앙본부 간부로 진출할 것과 민단내부 정보를 수집해 보고할 것, 포섭가능한 인물을 선정해 보고할 것 등을 지시하였다.

방원정에게도 북한지령 수신 및 해독방법 등을 교육하고 김포공항의 대공포 진지 배치상황, 현대조선소 위치 및 도크 규모, 대학생들의 반정부시위 현황 등을 보고받았다.

1983년 5월 복귀지령을 받은 신광수는 또다시 하라다다아키의 여권을 소지하고 합법적으로 여객기를 이용해 북한으로 향했다. 도쿄 나리타공항을 출발한 신광수는 스위스 취리히, 비엔나, 모스크바를 경유해 평양 순안공항으로 입국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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