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재봉
함재봉

조선은 미국으로부터 기독교(개신교)와 민주주의를 배운다. 첫 매개는 1884년 「갑신정변」을 전후로 조선에 정착하기 시작한 미국의 선교사들이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은 조선은1881년 일본에 「신사유람단」을, 1882년 초에는 청에 「영선사」를 파견하여 조심스레 개국을 시도한다.

그러나 신사유람단이 귀국도 하기 전인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발발하면서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1.1.24-1898.2.22)이 다시 권력을 잡는다. 비록 청군이 개입하여 대원군을 청으로 압송함으로써 고종과 민중전, 민씨 척족이 권력을 탈환하지만 개국과 근대화에 대한 위정척사파와 쇄국주의자들의 저항이 얼마나 강했는지 보여준 사건이었다.

「임오군란」 후 정국이 다시 안정을 찾아 가고 있던 1883년 5월 루시어스 푸트(Lucius Foote, 1826.4.10~1913.6.4) 초대 주 조선 공사가 한양에 부임한다.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통상조약」의 후속 조치였다. 청의 속방을 자임하던 조선은 워싱턴에 재외 공관을 개설하고 상주 외교관을 파견하는 대신 답례로 1883년 7월 「보빙사」를 미국에 보낸다. 조선이 구미열강에 파견한 첫 공식 사절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기독교 전교는 여전히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천주교 박해와 쇄국 정책을 주도하던 흥선 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난지 10년이 되었고 임오군란도 실패로 끝났지만 조선 조정이 볼 때 가톨릭이나 개신교는 모두 「양이(洋夷)」 즉, 「서양 오랑캐」가 믿는 이단이었고 여전히 위세를 떨치던 위정척사파가 「척(결)」하고자 하는 「사(이비)」 종교였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은 조선 선교를 시작할 수 있는 뜻 밖의 기회를 잡는다. 「갑신정변」이었다. 친일개화파의 몰락을 가져온 「갑신정변」은 친미기독교파 형성에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1884년 12월 4일, 안국동 우정국 낙성식장에서 연회가 무르익던 밤 10시, 「불이야」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갑신정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연회의 좌장이었던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이 자리에서 일어나 상황을 파악해 보겠다며 우정국 건물을 나서는 순간 기다리던 정변세력의 칼을 맞는다. 다른 참석자들과 함께 건물 안에서 기다리던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f, 1847.2.17~1901.4.20)는 불이 난 방향이 자신의 집이있는 박동(수송동)인 듯하다는 말을 듣고 빨리 집에 가봐야겠다며 건물 밖으로 나간다.

그때 칼을 맞은 민영익이 그에게 다가와 쓰러진다. 묄렌도르프가 피투성이가 된 민영익을 부축하고 들어오자 건물 안에 있던 조선 관리들은 모두 관복을 벗어던지고 담 넘어 도망친다. 묄렌도프르는 유일하게 현장에 남아 있던 미국 공사 푸트와 함께 민영익을 지혈시키는 한편 사람을 보내 자신의 가마를 부른다. 1시간 가량 지나 가마와 호위병들이 도착하자 묄렌도르프는 민영익을 자신의 집으로 호송한 후 곧바로 미 공사관의 의사 호러스 알렌(Horace Allen, 1858.4.23~1932.12.11)에게 사람을 보낸다

칼을 7군데 맞는 중상을 입은 민영익은 알렌의 헌신적인 치료 덕분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다. 민중전이 가장 아끼는 조카였으며 민씨척족의 차세대 대표로 부상하고 있던 민영익이었다. 그런 민영익을 살린 알렌은 고종과 민중전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는다. 알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고종으로부터 병원을 열 수 있는 허가를 받아낸다.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은 고종의 윤허와 민영익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갑신정변이 일어난지 불과 4개월 후인 1885년 4월 9일첫 환자를 받는다. 신의 한 수였다.

저작권자 © 자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