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신교 전래 전야의 조선

원래 중국에 선교사로 파견되었던 호러스 알렌은 중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1884년 10월 조선으로 건너와 있었다. 선교가 허락되지 않는 조선에서 알렌은 미국 공사관의 무급 의사로 일하고 있었다. 당시 한양의 유일한 서양 의사로 몇 안 되는 서양 외교관들의 주치의였다.

1884년 12월 4일 밤 갑신정변이 발발하고 민영익이 정변파의 칼을 맞자 묄렌도르프와 푸트 공사는 곧바로 알렌을 부른다. 알렌은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던 민영익을 기적적으로 살려냄으로써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 개원 허락을 받는다. 미국 개신교의 조선 선교는 이렇게 시작됐다.

선교사 호러스 알렌. 한국 최초의 서양인 의사로서 구한말의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쌓았다.
선교사 호러스 알렌. 한국 최초의 서양인 의사로서 구한말의 한반도와 깊은 인연을 쌓았다.
민영익.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았다.
민영익. 고종과 민비의 총애를 받았다.

민영익은 본의 아니게 미국 감리교의 조선 선교에도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한다. 1883년 7월 보빙사로 미국을 방문한 민영익은 9월 14일 시카고에서 워싱턴으로 가는 기차 속에서 미국 감리교의 존 가우처(John F. Goucher, 1845~1922) 박사를 우연히 만난다. 미국 감리교의 아시아 선교를 적극 지원하던 가우처는 보빙사 일행을 만나면서 때가 왔음을 직감하고, 곧바로 당시 일본 선교를 주도하던 로버트 매클레이 목사(Robert Samuel Maclay, 1824~1907)에게 편지와 자금을 보내 조선 선교를 종용한다.

갑신정변 발발 6개 월 전인 1884년 6월 부인과 함께 처음 조선을 방문한 매클레이는 일본에서부터 구면이던 김옥균을 통해 고종으로부터 병원과 학교를 지어도 좋다는 윤허를 받아낸다. 일본으로 돌아간 매클레이는 조선에 파견할 선교사들을 속히 보낼 것을 미국 감리교 선교회 본부에 요청했다.

존 가우처 박사. 미국 감리교회 목사로 아시아 선교를 적극 지원했다.
존 가우처 박사. 미국 감리교회 목사로 아시아 선교를 적극 지원했다.
새뮤얼 맥클레이. 미국 감리교 목사. 19세가말 일본 선교의 중심인물이었다.
새뮤얼 맥클레이. 미국 감리교 목사. 19세가말 일본 선교의 중심인물이었다.

감리교 선교 본부는 헨리 아펜젤러 목사(Henry Appenzeller, 1858~1902) 내외와 의사 윌리엄 스크랜턴 박사(William B. Scranton, 1856~1922) 내외, 그리고 스크랜턴 박사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Mary F. Scranton, 1832~1909) 여사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한다. 조선의 첫 감리교 선교사들은 1885년 2월 27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그러나 갑신정변 직후 정정이 불안한 조선에 섣불리 건너가지 못한다.

한편 원래 인도 선교사로 파견되길 원했던 장로교 목사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는 1882년 겨울 미국 뉴저지주의 뉴브런즈윅 신학 대학(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 재학 당시 교정에서 열린 한 선교 모임에서 미국과 갓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조선에 대한 논문 발표를 듣고 조선으로 파견될 것을 자청했다. 미국의 장로교 선교 본부는 조선 선교가 시기상조라 여기고 언더우드의 파견을 차일피일 미루지만, 언더우드는 결국 본부를 설득해 조선 선교를 명 받고 1884년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1885년 1월 일본에 도착한다. 그러나 그 역시 갑신정변 직후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던 조선에 건너가지 못했다.

헨리 아펜젤러 목사.
헨리 아펜젤러 목사.
윌리엄 스크랜튼. 의사이자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튼. 의사이자 선교사.
미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이화여개 창시자이기도 하다.
미 감리교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이화여개 창시자이기도 하다.
호러스 언더우드. 미 장로교 목사.
호러스 언더우드. 미 장로교 목사.

미국 선교사들이 일본에서 초조하게 상황을 엿보던 바로 그때, 알렌의 주도 하에 한양에 광혜원이 열릴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진다. 선교사들은 일제히 조선으로 건너왔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부부는 같은 배로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조선에 도착한다. 그러나 여전히 상황이 불안하다는 판단에 아펜젤러 부부는 일단 일본으로 돌아가고, 언더우드만 한양으로 향해 4일 후인 4월 9일 광혜원이 공식 개원하는 첫날부터 광혜원에서 알렌을 돕기 시작했다. 스크랜튼은 5월 3일 입국해 광혜원에 합류하고,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튼 가족들은 6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한다.

개신교 도래 전야의 조선

미국의 선교사들이 도착 할 즈음의 조선은 주자 성리학에 기반하는 봉건 질서의 이념적·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모순이 극에 달하면서 몰락하고 있었다. 이념적으로는 명-청 교체기를 겪으면서 수립한 ‘소중화’ ‘숭명반청’ 사상이 쇄국 정책과 함께 배타적이고 폐쇄적인 사유체계 속에 매몰돼 있었다. 대외적으로는 원-명-청을 통해 수립됐던 중화질서가 구미 열강의 도래와 일본의 근대화로 몰락하고 있었지만, 명의 조공국으로 청의 속방으로 중화질서의 한 축을 자임해 오던 조선은 문명사적 대전환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국내 정치의 난맥상은 극에 달해 있었다. 1874년 흥선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하고 친정을 시작한 고종은 실정을 거듭하면서 국력을 고갈시킨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었지만 그 의미도 몰랐고 대비책도 전무했다. 1882년 미국·영국·독일·러시아와 수교를 했으나 ‘개항’을 국가 개혁의 기회로 삼기에는 바깥 세상, 통상·경제에 대해 무지했다.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발발하여 흥선대원군이 8년 만에 다시 권력을 잡는 듯했다. 그러나 청군이 개입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중국으로 압송하여 바오딩(保定, 허베이 성)에 안치함으로써 오히려 민 중전과 민씨 척족의 숙적이 제거된다. [임오군란에 대해서는 제1권, 제2부, 제9장, ‘2.대원군의 반격: 안기영 역모 사건과 임오군란’ 참조]

1884년에는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 친일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켜 민씨 척족의 거두였던 민태호·민영목 등을 주살하지만, 역시 청의 개입으로 ‘삼일천하’로 끝나면서 오히려 친일 개화파가 제거된다. [갑신정변에 대한 논의는 제2권, 제11장: ‘갑신정변과 친일개화파의 몰락’ 참조]

갑신정변의 실패로 모든 권력은 당시 32세였던 고종, 33세였던 민 중전, 32세였던 민영준(민영휘), 그리고 24세였던 민영익 등이 장악한다. 그 후 ‘청일전쟁’이 발발하는 1894년까지 10년 동안 고종과 민중전, 민씨 척족의 폭정 하에 조선은 무너진다. 경제·외교·국방은 물론 교육·의료 등 정부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마저 방기한 채 국가로서의 면모를 잃었다.

흥선대원군.
민영준(민영휘).
민영준(민영휘).

과거제도가 타락하고 매관매직이 절정에 달하면서 전통적 유교 교육은 유명무실해진다. 민씨 척족이 주요 관직을 독식하고 그들에게 아부하는 일부 관료들만 출세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서당·서원·성균관 등을 통한 전통적인 사교육·공교육이 무너진다.

경제는 수 십 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무너지지만, 조선의 지도층은 경제를 개혁할 지식도 의지도 없었다. 조선의 친중 위정척사파들은 여전히 상업을 죄악시하면서 ‘사농공상’의 농본 사회를 바탕으로 한 ‘왕도 정치’의 이상을 고집했다. ‘왕도 정치’에서 정부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관개수리시설의 유지와 확장이었으나, 19세기 말 조선 정부는 이 마저 방기한다. [왕도 정치에 대해서는 제1권, 제2부, ‘5. 왕도 정치 대 부국강병’ 참조.] 백성들은 흉작과 기근에 시달리고 전염병과 도적떼가 창궐하지만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경제가 무너지는 가운데 정부의 세수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백성에 대한 수탈이었다. 정부에 의한 노골적인 수탈이 이어지면서 노동생산성과 노동윤리는 땅에 떨어진다.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면서 조선 사회는 기강과 윤리도덕이 무너진, 적나라한 ‘강자존’ ‘약육강식’의 ‘자연 상태’로 전락한다. ‘아비규환’이었다.

개신교와 칼뱅주의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전파하기 시작한 기독교는 ‘칼뱅주의(Calvinism)’와 ‘복음주의(Evangelicalism)’에 기반한 개신교였다. 칼뱅주의는 종교개혁이 파생시킨 수 많은 개혁 사상 중 개신교의 신학을 이론적으로나 제도적으로 가장 철저하게 구현한 사상이다. 칼뱅주의를 ‘개혁 신학(Reformed Theology)’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한편, 복음주의는 17세기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경건주의(pietism)’의 영향을 받아 교회의 제도나 전례 대신 개인 내면의 영성적인 변화, 회심과 회개를 중시하는 미국 특유의 개신교 운동이다. 특히 감리교 부흥 운동을 통해 미국에 전파된 복음주의는 이후 교파를 초월해 미국 개신교의 특징으로 자리잡는다. 칼뱅주의가 제도와 규율을 통해 중세 사회와 교회를 개혁하고 그 개혁을 추동 할 수 있는 ‘성도(saint)’를 양성하고자 했다면, 복음주의는 제도와 규율을 철저하게 내면화시키고자 했다. [『한국 사람 만들기 III: 친미기독교파 1』 ‘서문’ 중에서]

함재봉
함재봉

#‘한국사람 만들기’연재를 시작한다(주1회, 총 24회 예정): 3권으로 된 동명의 학술서 일부를 저자가 쉽게 풀이해 들려준다. 한반도의 백성들이 어떻게 근대적 국민으로 성장해갔는지, 현대문명으로서의 기독교가 어떻게 우리 근대사에 관여했는지, 나아가 대한민국의 탄생과 발전이 얼마나 특별하고 값진 것인지 깨닫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함재봉(1958~): 한국학술연구원장.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유네스코 본부 사회과학국장,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USC) 교수, 랜드연구소 선임 정치학자, 아산정책연구원장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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