⑥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활약

1897년 11월 영은문 헐고 독립문 건립
1898년 3월 최초 만민공동회 종로 개최
1898년 11월 중추원 의관(의원)으로 임명됨

1898년 3월 서울 종로(운종가)에서 개최된 만민공동회 모습. 인파 뒤로 상가 지붕이 보인다.

서재필의 가르침을 받으며 1897년 7월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을 주제로 영어 연설을 한 청년 이승만이 그로부터 1년 전인 1896년 7월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 일을 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하다. 졸업 후인 1898년 1월, 4월, 8월 이승만이 잇달아 창간한 협성회회보, 매일신문, 제국신문 또한 그로부터 2년 전인 1896년 4월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의 청년 버전이었다.

서재필이 중심이 되어 유길준, 윤치호, 이상재, 주시경 등 개화파가 대거 필진으로 참여한 독립신문의 1896년 4월 7일 창간호 논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가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요.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밝힐 것이오. 사사로운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이다."

당시 조선은 열강의 이권 다툼에 편승한 관리들의 부패로 국익을 지키기는커녕 나라의 독립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를 몰아 1985년 10월 왕실이 거처하는 경복궁 내전으로 자객을 난입시켜 고종의 부인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켰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결국 1896년 2월부터 1897년 2월까지 1년 동안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했다.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거처하는 궁궐에서 왕비가 자객에게 죽임을 당하고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왕이 1년 동안 외국 공관에 피신하는 나라가 과연 독립을 유지하는 제대로 된 나라인가? ‘독립협회’는 바로 이 아사리판 한가운데 시점인 1896년 7월 2일 열강의 조선 침략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한 서재필에 의해 창립된 단체다.

독립협회에는 앞서 나열한 독립신문 필진이 대거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이완용, 안경수, 박정양 등 당시 정부의 개혁적인 고위관료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서재필의 제자로 온 세상이 주목하던 개화파 청년 이승만이 독립협회에 이름을 올리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독립협회는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를 상징하는 영은문(迎恩門)과 모화관(慕華館)을 헐고 그 자리에 조선의 독립을 상징하는 문을 세우자는 주장과 함께 출발한 단체다. 이를 위한 국민들 성금이 쌓여가자 왕실도 비용을 보탰다.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 떠 만든 독립문이 마침내 무악재 아래 우뚝 선 것은 착공 1년 만인 1897년 11월이었다.

독립문 완공 한 달 전인 1897년 10월 고종은 소공동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圜丘壇)을 짓고 스스로 ‘대한제국’의 ‘황제’로 칭하며 열강과 대등한 자주국임을 과시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결국 식민지로 전락하는 조선의 마지막 발버둥일 뿐이었다. 만약, 고종이 독립협회의 주장과 활동을 받아들여 개혁에 성공했다면 역사는 전혀 달리 전개되었을 수도 있었다. 분명한 것은 이 갈림길 한복판에 청년 이승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1898년 3월 독립협회는 지금의 종로 보신각 근처에 있는 시장 거리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는 대중집회를 조선 역사상 처음으로 개최했다. 1만여 명이라는 엄청난 인파가 모였다. 얼지 않는 부동항(不凍港)을 찾아 부산 영도(절영도)에 대한 조차권을 요구하던 러시아의 행태를 문제 삼은 만민공동회 연사들의 주장이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자 대중은 열광했다.

독립협회 특히 만민공동회에서 이승만이 한 역할에 관해서는 이승만 본인이 영문으로 쓴 여러 버전의 ‘자서전’ (Autobiography) 을 포함해 다양한 기록이 존재한다. 그중 가장 정리가 잘 된 문헌은 어릴 적부터 이승만의 동네 친구이자 배재학당은 물론 나중에 옥중 생활도 상당 기간 같이 한 ‘신흥우’가 1949년 4월 12일 올리버(Oliver) 박사와 대담한 영문 기록이다.

이 기록은 이정식 교수가 2005년 출판한 책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391-401 쪽에 ‘이승만을 말한다’라는 제목을 달고 한글로 정리되어 있다. 아래 일부를 인용한다. [ ] 속은 필자가 보완한 내용이다.

"이승만은 독립협회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처음에는 연장자들에게 눌릴 수밖에 없었지만 차차로 그의 영향력은 커져갔다.... 이승만은 독립협회 외곽에 있었지만, 그의 연설은 세밀하고 박력이 있어 유명하게 되었고 존경을 받게 되었다.... 임금은 독립협회를 무시해 버렸는데, 독립협회 회원들은 밤낮으로 덕수궁 앞에서 그리고 종각 근처 광장에서 데모 집회를 열었다. 친러파 관리들은 ‘황국협회’를 만들어 보부상과 불량배들을 고용해서 폭력으로 독립협회 모임을 해산시키도록 했다.

이승만같이 과감한 사람들이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이승만 등은 덕수궁 근처에 있는 독일 공관 쪽의 낮은 담을 넘어 도망쳐 배재학당으로 피하곤 했다.... 황제는 타협하기를 원했다. [마침내 1898년 11월 고종은] 독립협회와 황국협회로 하여금 25명씩 대표를 선출해 ‘국회 비슷한 기관’[중추원]을 구성하도록 했다. 이승만도 그 중의 하나로 임명되었다 [종9품 의관]. 윤치호가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런데 중추원 첫 모임에서 이승만이 일본에 망명 중인 모든 망명객들을 소환해서 공개적이고 공정한 재판을 거치도록 하자고 주장했다. [188412월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난 직후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수많은 개화파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들 중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 일부는 18855월 미국으로 건너가 뿔뿔이 흩어졌고, 김옥균은 윤치호가 있는 상해로 넘어갔으나 결국 18983월 홍종우에게 암살됐다. 그럼에도 류혁로 신응희 이규완 정란교 등 개화파 인사들 상당수는 189811월 현재까지 일본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래서 죄가 있으면 벌을 주고 죄가 없으면 전직(前職)에 복귀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이 있자 [일본이 저지른 을미사변으로 왕비를 잃은] 황제는 노할 대로 노해서 중추원을 즉각 해산시키고 중추원 의원들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립협회 출신들 여러 명은 [치외법권 지역인] 외국인 거주 지역으로 피신했다. 이승만도 미국 감리교회와 배재학교가 있는 곳에 피신했다... 어느 날 오후 신흥우 등이 이승만을 만나러 갔다. 그때 이승만은 미국 감리교 의사와 대화할 수 있는 정도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셔먼(Sherman) 의사는 근처에 사는 환자를 보러 가게 되어 있었는데, 이승만에게 물었다. ‘나하고 같이 갔다 오겠냐’는 것이었다. 한동안 틀어박혀 살게 되어 싫증이 나고 있던 이승만은 ‘그래요’ 하고 따라나섰다. 그들이 지금의 한국은행 앞 광장에 있던 일본 영사관 근처에 다다랐을 때 평복을 입은 형사들 몇몇이 뛰쳐 나와서 이승만을 체포해서 유치장으로 끌고 가버렸다."

이정식 교수의 책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표지 (2005년 배재대 출판부). 신흥우가 1949년 4월 올리버 박사와 대담한 ‘이승만을 말한다’ 수록.

큰 죄를 짓지도 않고 끌려간 감옥에서 이승만은 결국 5년 7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20대 중후반의 황금 같은 나날을 갇혀있게 됐다. 좌절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그 시간은 이승만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 감옥은 그를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갔다. 이승만을 미래로 이끈 신작로는 감옥에서 활짝 열렸고, 이승만은 마침내 그 길의 입구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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