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신
임명신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한 외교정책 전문지에 ‘End of History?’(역사의 종언?)를 발표한 게 1989년 여름이었다. 이 글은 그해 11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 해체를 맞으면서 세계적 각광을 받게 됐다. 나중에 물음표만 떼어 낸 동명의 단행본(한국어판 <역사의 종말>)으로 그는 드라마틱한 역사변화를 가장 간명하게 짚어낸 학자로 우뚝 섰다. 파시즘을 꺾고 공산체제까지 굴복시킨 ‘자유민주주의 =역사발전의 완성태’라는 게 후쿠야마 역사종언론의 골자다.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전파로 해석된 나폴레옹전쟁을 보며 헤겔이 생각한 '역사의 종언' 개념의 틀을 마르크스가 현존 자본주의를 부정하기 위한 주장에 써먹었다. 헤겔연구자 후쿠야마는 다시 마르크스의 어법을 뒤집어 활용한 것이다. 역사발전의 끝(최종단계)이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체제라는 것, 대결에 결판이 났고 이제 승리의 확산만 남았다는 선언이었다. 자유민주주의에 당연히 동반될 ‘시장경제(자본주의)의 확산’ 선언이기도 했다.

역사종언론은 후쿠야마를 스타 학자로 만들어 줬지만 그후 여러 번 난감한 도전에 부딪혔다. 자유민주 없이 승승장구한 중국자본주의, 2008년 금융위기, 더구나 그가 최후의 승자로 본 미국에서 근년 사회주의 담론이 불거진 점이다. 버니 샌더스(81) 상원의원 외에도 서유럽 사민주의자들 못지 않게 좌경화된 정치인들이 늘어난 가운데 감지된 것은 양극화, 미국 자본주의에 대한 위기의식이다. 해외로 사업체 및 공장들이 옮겨간 이래 중산층·서민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극심해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재임시절 사회주의를 콕콕 집어 연설한 바 있다. "사회주의는 번영을 약속하지만 가난을 가져온다"며 운을 떼더니, "단결" "더 나은 미래"를 약속하지만 "증오와 분열" "과거의 암흑기를 되살리는", "역사와 인간본성에의 무지에 기반한 용도폐기된 이데올로기"라고 명언했다. "정의·평등·가난구제와 무관하며 오로지 지배를 위한 권력에 관심 있을 뿐, 의료서비스·교통·금융·에너지·교육 등 모든 것의 결정권을 원하는 게 사회주의", "미국이 결코 사회주의자들의 나라가 되진 않을 것"이라고 외쳤다. 자본주의 아성 미국에서 대통령이 어쩌다 이런 호소까지 하게 됐을까.

승자란 방만하기 쉽다. 이 이치를 간과했다는 점이 후쿠야마 역사종언론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이다. 경쟁자가 사라지면 나태해지기 마련이다. 1990년 에릭 홉스봄이 "자본주의와 부자는 당분간 겁날 일 없겠다"며, 더욱 엄청난 초과이윤 추구의 시대가 열렸음을 반어적으로 우려한 바 있다. 사회주의와 그 현실태로서의 소련·동구권 존재로 인해 서방세계는 자기점검에 애썼으나, 한 세대 넘게 경쟁·견제 없이 지내며 도덕적 해이를 면치 못했다. 인지상정이다.

미국은 소련에서 막 벗어나 얼떨떨한 상태의 나라들을 자유세계의 동반자로서 자본주의에 적응하도록 인도했나? 그렇게 보긴 어렵다. 반면 초엘리트들이 중국공산당과 손잡고 어떤 혜택을 누렸는지, 우크라이나전쟁 발발을 계기로 끝장난 탈냉전 30 여 년을 뼈아프게 복기해 봤으면 한다. 자유민주주의의 확산 대신, ‘자유민주주의 심화 성숙’의 절실함을 말하고 싶어지는 이유다.

우리 현대사는 대한민국-반(反)대한민국의 대결 역사였다. 한국전쟁이 사실상 계속돼 왔다는 엄연한 사실 또한 역사종언론의 큰 허점이다. 자유민주 체제란 내외의 파괴자들 앞에 취약하다. 그래서 지키고 가꿔야 한다. 최근 다양한 매체를 통해 간첩들 소식과 과거 햇볕정책 기조 하에 덮인 이적행위들을 접하며, 이념·체제 경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절감한다. ‘요즘 세상에 웬 간첩!’ ‘색깔론’ ‘국정원에 복귀한 사람들이 오버한다’ 식의 반응이야 말로 시대착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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