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신
임명신

지난주 션윈(神韻)을 봤다. 고대하던 관람이었다. "공산당 이전의 중국" "5000년 문화유산의 복원"을 내세운 예술단체의 무대, 어렵게 성사된 공연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주요 공연장 대관을 계속 거절당했으며, 17일 공연 때도 앞서 국립극장 경내에 시위대의 소란이 있었다고 한다. 션윈의 배후 파룬따파(法輪大法)에선 불교·도교 융합의 구세적 가르침과 수련(파룬공)을 병행한다. 중국에선 금지돼 있다. 1990년대말 대대적 탄압을 당하면서 창시자(李洪志)는 미국에 망명한 상태다. 공산당의 위협이 될 여론형성 가능성을 봉쇄당한 것이다.

이후 해외 파룬따파 세력은 "천멸중공"(天滅中共) 등 격렬한 反中구호의 발신처가 됐다. 션윈 홈페이지에 따르면 ‘2023 월드투어’로 8개 공연팀이 오대륙 수백개 도시에서 수백 회 무대를 펼친다. 해설을 곁들인 2시간 공연은 중국사의 몇몇 유명 고사나 설화를 그린 무용극들과 소수민족 춤이 주류지만, 특유의 정신적 가치관이 담긴 무용극·성악곡도 들어있다. 정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중국의 어두운 현실을 그린 무용극이었다. 박해받는 파룬궁 수련자를, 그들의 시신이 장기적출·판매 비즈니스에 쓰인다는 으스스한 암시.

션윈 무용수들의 기량 역시 훌륭한 편이지만 중국 내 예술단들과 겨루긴 어려울 듯하다. 인민해방군 및 각급 정부 산하 예술단의 무대는 이미 상당히 압도적이다. 고전무용보다 션윈이 특화시켜야 할 것은 중공 현실의 고발과 파룬따파의 예술적 형성화 아닐까 싶다. ‘세상에 내려와 중생을 구하다’로 시작된 다차원 그래픽 배경의 공연은 ‘흰 옷 걸친 존재’(신? 구세주?)의 형상이 장엄한 황금빛 아우라 속에 나타나 무대를 가득 채운 후 막을 내렸다. 처음과 끝이 ‘구세’의 메시지로 장식된 셈이다. 좀 당황스러웠지만 금방 이해가 갔다. 가치와 의미 없인 살 수 없는 게 인간이니까. 탈종교 탈이념의 시대를 산다는 사람들도 대체재를 찾거나 허무에 시달린다. 내가 션윈 공연을 보며 확인한 것은 산업사회를 살아갈 가치관의 부재, 그에 따른 현대중국인들의 결핍감이었다.

전 세계 공자학원이 스파이활동의 근거지가 되면서, 국가이미지 제고와 인류사적 새 권위의 주장에 공자를 활용하려던 중공의 기획도 무산됐다. 결국 중국인들의 일상과 보편심리를 지배하는 것은 2000년전 전래돼 ‘대승 종교’로 발전한 불교, 수련을 통한 양생과 평안을 추구하는 도교 전통이다. 과연 이것들이 초고도산업사회·초연결시대다운 세계관 인생관을 제시할 수 있을까?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은 서구와 일본이 거친 자본주의 전개과정의 거부를 천명한 사건이다. 1400년전 들어온 기독교도 소멸,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농민혁명에 적용한 마오이즘이 공식 이념(신앙)으로 자리잡았다. 개혁개방 40 여년인 오늘날, 공산당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통해 ‘중국특색사회주의’ ‘중국몽’으로 압축된다. 문제는 타향살이와 기존 공동체의 해체가 불가피한 산업화 도시화 속에서 상처받고 지친 영혼들을 위로하며 삶의 의지를 북돋을 수 있는가다.

션윈의 소프라노가 노래했다. "무신론 진화론이 인류를 해롭게 해···." 은혜와 감사, 시련의 축복, 영성과 선교열정, 기도문을 가사로 한 기독교 찬송가에 비하면 사상운동 단계 같다. 물론 파룬따파가 산업사회의 현재 미래를 이끌 교리체계와 생활규범을 구축했는지 여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자유민주주의와 동행 못할 것은 없으리라 판단된다. 중공이 자유·인권을 인정 못하는 것은 이것들을 넘어설 가망이 없어서다. 패권의 꿈은 집요한데 인류를 인도할 이념과 미래비전이 없다는 것, 중공의 궁극적 곤혹이자 기독교와 공존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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