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명신
임명신

동일한 사안·사물이나 현상을 지칭하는 용어가 다르면 대화는 겉돌 수밖에 없다. 똑같이 생겼으나 내함을 달리 한 어휘들도 마찬가지다. 최근 한·일 정상회담과 관련해서 윤석열 정부의 결단을 높이 평가하지만 한국사회의 근본적 한계를 새삼 느꼈다. 국가 간 관계, 역사를 ‘피해-가해’ 이분법으로 보는 유권자들 때문에 윤 대통령 운신이 더 제약을 받는다.

일제강점기-식민지기, 강제징용피해자-전 징용공(조선인노동자) 등등 용어적 괴리 만큼 한·일 간 시각차 입장차가 수면 하에 도사리고 있다. 객관적 ‘사실 적시’인가, 피해-가해의 구도에 입각한 ‘해석’인가의 차이다. ‘승자’ ‘패자’가 있을 뿐 ‘영원한 승자’ ‘영원한 패자’도 없는 게 국제정치와 역사 아닐까. 지난 30여 년 자리잡은 ‘일제강점기’보다 해방 후 수십년간 쓰던 ‘일제시대’가 오히려 타당해 보인다.

축적된 관련 연구에 따르면, 한일합방은 법적 효력을 가진 문서에 위정자들이 정식 서명해 벌어진 사태였다. 일본 아니면 제정러시아 식민지가 될 판이었다. 일제는 조선을 상대로 논리와 물량 양면공세를 폈고, 이씨 왕실은 두둑한 세비를 받으며 일본황실에 편입됐다. 처절한 ‘세포이의 항쟁’ 끝에 영국 식민지가 된 인도 무갈제국과 대비된다. ‘원치 않는 국권포기’가 전면전 없이 이뤄진 예를 달리 들어보지 못했다. 산발적 의병봉기 수준의 저항 속에 강행된 한일합방 정도면 ‘평화로운 국권포기였다’ 해도 할 말이 없다. 무력을 경시한 극단적 문치국가였음을 감안해도 특이하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처럼 우리도 ‘정명’(正名), ‘이름을 바르게 하는 것’이 절실하다. 어지러운 세상, 위기의 시대임을 뜻한다. 이름을 따지는 것, 사실상 내실을 문제삼는 일이다. "정치를 한다면 먼저 무엇을 하겠느냐" 묻자 공자는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 했고, "정치란 ‘바로 잡는 것’(政者正也)"이라고도 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君君 臣臣···), 너무나 유명한 구절이다. 공자가 최고의 책으로 친 주역에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세상 모든 것엔 걸맞는 이름이 필요하며, 이름은 실상에 대응해야 한다. 판단과 처신의 근거가 될 ‘같고 다름’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을 분별하려면, 명분과 실질(名實)이 서로 부합(相符)해야만 한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좌파’ ‘우파’ ‘민족주의’ ‘일제강점기’ ‘일본군위안부’ 등등이 실질에 얼마나 부합하는지 제대로 들여다 봤으면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요즘 우리나라의 이른바 ‘좌파’는 ‘반한(反韓)’세력으로 보는 게 실질에 더 맞다. 물질적 욕망을 분출시키면서, 신정일치 3대세습을 ‘우리민족끼리’ 논리로 옹호하는 게 ‘좌파’ ‘진보’일 수 없다. ‘우파’ 역시 실질을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 상인정신 무인정신 개척정신의 폄훼는 ‘우파’ ‘보수’ 가치와 거리가 멀다. 노블리스 오블리쥬, 배움·앎을 향한 열정, 현실과 이상을 넘나들 유연함 등을 가리킬 개념으로 더 치밀하게 다듬어진다면 우파적 가치에 ‘선비정신’도 추가해 볼 만하다.

시대성을 지닌 진기한 건축물(중앙청)을 밀어냈고 "민족을 넘어설 가치란 없다"던 한 전직 대통령은 ‘우파’로 분류되지만, 약소국 식민지출신 국가의 민족해방론에 포박된 상태였다. 서구에선 온 근대적 개념 ‘민족주의’와 중세적 공동체 해체에 대한 원한이 서린 ‘반일’을 함께 쓸 수 없다. ‘반일민족주의’가 한 단어로 성립할 수 없는 이유다. 세계관 가치관을 공유할 ‘남’(과거의 적)과 손잡을 줄 아는 게 ‘우파’다. ‘민족’이란 ‘네이션’(nation)에서 왔으나 번역어로서 시효가 다했다. 네이션은 혈연공동체를 넘어선 가치공동체 ‘국민’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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