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영
정구영

사유재산을 국가 소유로 만들어 공유하면 착취 없는 세상이 되고,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것이라는 망상(妄想)에서 나온 것이 공산주의다. 북한의 협동농장과 개인 텃밭을 보면 단번에 알 수 있다.

‘농장 포전(圃田)은 나의 포전’이라는 구호가 대표적이다. 포전은 구획을 나눠놓은 경작지다. 한마디로 협동농장의 포전을 개인 텃밭처럼 정성을 다해 가꾸라는 뜻이다. 이는 극심한 공유지(公有地)의 비극이 벌어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농지는 한 국가의 체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1945년 8월의 한반도는 모든 면에서 진공상태였다. 사람과 땅은 있지만 누가,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이끌지 몰랐다.

다만 농민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도구로 이용하기 위해 선수를 친 것은 김일성이었다. 1946년 3월 김일성 명의로 발표된 토지개혁법령은 일본인이 소유했던 토지와 5정보 이상 조선인 지주의 토지를 무상 몰수해 무상으로 농민에 분배하는 것이 골자다. 농사를 짓는 땅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농지개혁인 셈이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농지의 개인 소유가 이뤄질 것이란 믿음은 순진을 넘어선 무지다. 실제 김일성은 농민을 속였다. 토지개혁법령 5조에 ‘무상분배한 땅을 영원히 농민 소유로 한다’고 명시했지만 1954년 시작돼 1958년 종료된 농업협동화운동의 제물이 됐다.

농지개혁은 남한에서도 화두였다. 농민의 70% 이상이 북한과 같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는 시장경제의 기반인 사유재산권을 부정하는 것이다. 소련 점령군의 무력을 앞세워 20일 만에 끝낸 북한과 달리 남한에서의 농지개혁이 더뎠던 이유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1949년 6월 농지개혁법을 공포했다. 연평균 생산량의 30%를 5년만 정부에 내면 자기 농지가 되게 했고, 지주들에게는 농지대금을 현금이 아닌 지가증권으로 지불했다.

지주들이 미리 농지를 임의 처분했기에 성과가 없었다는 좌파진영의 주장은 거짓말이다. 일부 농지가 사전에 매각된 것은 맞다. 하지만 지주들이 임의 처분한 농지는 판매가격이 매우 낮았다. 지주들은 무상몰수가 두려워 개혁 이전에 농지를 매각하려 했고, 이는 일시에 많은 농지가 시장에 쏟아져 나온 요인이 됐다. 농지개혁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이 적었던 것도 지주들에게 상대적으로 불리했기 때문이다.

농민의 상환부담이 컸다는 주장도 왜곡된 것이다. 5년간 부담액을 내지 못해 자기 농지를 갖지 못한 농민은 한 명도 없었다. 농민은 이를 발판으로 자녀를 교육해 1945~1955년 사이 중·고등학생은 8.4배, 대학생은 9.9배 늘었다.

농지분배는 6·25전쟁 발발로 잠시 중단됐지만 1951년 4월 재개됐다. 그 결과 1945년 말 전체 경지면적의 35%에 불과했던 자작농지가 1951년 말에는 96%로 치솟았다. 이승만 대통령은 시행령이 완비되기 전인데도 1950년 4월까지 농지분배 예정 통지서를 발부했다. 이에 남한 농민은 5월부터 토지대장 열람을 통해 최소한 자신의 땅이 어디 있는지 인식할 수 있었다. 이는 전쟁 기간 동안 북한군에 호응하는 등의 내부 동요를 막아 결과적으로 남한의 공산화를 막는 요인이 됐다. 건국 못지않은 업적이다.

이로 인해 선거를 앞둔 좌파 정치인도 가끔은 ‘국부’로 호칭한다. 하지만 기를 쓰며 기념관 건립을 막는 것에서 보듯 전술적 허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아직도 오래된 사택(私宅)인 이화장(梨花莊)에 갇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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