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윤
이상윤

명징한 겨울날은 유달리 하늘이 파랗다. 능선이 하늘 아래 선명하게 펼쳐져 있고, 숲에 들면 나무들 속속들이 자신을 보여준다. 각자 참 모습은 꾸밈없고 청명하다. 그런 날, 산청 남사마을에 사는 이호신 화백의 ‘지리산 생활산수’ 그릴 장소를 안내하기로 했다. 오늘은 하동의 4계 가운데 겨울을 그리기로 한 날. 시키지 않았고 끝낼 날 언제일지 모르는 이화백의 ‘지리산 생활산수화’는 5개 시군의 4계절 생태와 역사문화, 삶의 모습을 담는 것.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니 지리산에 사는 빚을 갚는 마음으로….’

지리산은 한 문화권이라는 특질 아래 역사 인문 지리적으로 다양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의 기질도 다르다. 낙동강과 섬진강, 수계권이 다르니 식생도 다채롭다. 다양성과 다채로운 지리산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은 것이 지리산둘레길이다. 3개도(전라남북도, 경상남도) 5개시군(남원시, 구례·산청·하동·함양군) 100여개의 마을을 이었다. 행정구역이라는 것이 얼마나 작위적인지 길을 걸어보면 안다.

더불어 선인들의 유람정신을 본받고자 했다. 은둔자로 지리산을 찾은 이나,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깊이 새겼을 ‘뭇 생명과 더불어 화해하는 세상’. 그들에게 각인된 지리산 정신(어머니 마음, 지리산 닮은 흔들리지 않는 무엇)을 살릴 수 있는 방편으로 지리산순례를 제안했고 그 길은 예부터 지리산 사람들이 이웃마을로 오간 길을 연결했다. 길이 다 이어졌을 때 이호신 화백은 지리산 구간을 모두 걷고 그려보겠다며 나섰다. 2여 년에 걸쳐 동행이 되어 그리고 쓴 게 ‘지리산 그림편지’로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다시 지리산을 담겠다는 그의 뜻에는 삶을 절차탁마하는 지리산 어른들의 혈이 배어있다.

오늘, 지리산 생활 산수는 지리산 하동 옥종이다. 지리산을 덕산으로 부르며 지리산을 닮은 인물들을 배출한 위대한 스승 ‘남명 조식’. 그 선생을 흠모하여 평생을 스승의 삶을 따라 산 겸재 하홍도 선생의 ‘모한재’. 고려 강민첨 장군이 15세에 심신을 연마하던 곳에 심은 900년 된 ‘두양리 은행나무’. 정몽주 선생을 기리는 ‘옥산 서원’. 선생의 손녀이자 지족당 조지서의 아내로, 역모에 연루되어 능지처참되어 한강에 뿌려진 남편의 시신을 수습한 정씨부인을 기린 ‘정려각’. 임진왜란 때 백의종군했던 이순신의 ‘백의종군로와 유숙지’. 진주성 전투에서 패배한 동학혁명군의 최후 항전지 ‘고성산성’.

이 모두를 옥산과 덕천강을 사이에 두고 시공간을 모아 한 폭의 그림에 담았다. 남명 선생이 지리산 유람을 마치고 정려각 앞에서 간수간산간인간세(看水看山看人看世)라 했다지. 세상을 산다는 일은 자연과 더불어 그 안에 사는 사람이야기라는 뜻이리라. 기후위기 시대, 좀 더 강하게 풀면 자연 안에 든 인간사 세상사라는 것이겠지. 자연이 없으면 인간도 없는데, 하동 옥종의 유적지를 돌아보며 앞서 간 선조들의 발자취에서 자연 속 한 점인 내 모습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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