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
이호선

사전투표제도의 위헌 여부를 가려달라는 헌법소원심판사건과 효력정지가처분 사건이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에 있다. 총선 전에 가처분 결정을 내려주길 촉구하는 시민들이 오는 23일부터 헌법재판소 앞에서 릴레이 시위를 할 예정이라고 한다. 1차 투표와 2차 투표로 변질된 기형적 사전투표제는 주권은 동일 시점에서 행사돼야 한다는 민주성의 근본원칙을 훼손하고, 유권자의 정보비대칭성으로 인한 투표의 실질적 등가성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것이 위헌 주장의 요지다.

지금처럼 누구나, 어디서건 이틀에 걸쳐 1차 투표를 하도록 하는 이상 사전투표제는 고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본투표 갈 것도 없이 1차 투표로 다 끝날 수도 있고, 특정 투표소 몇 곳에서 대한민국 유권자들의 모든 투표권이 다 행사될 수도 있다. 암만 봐도 정상이 아니다. 헌재가 제대로 한 획을 그어주길 바랄 뿐이다.

이와 별개로 ‘사전투표관리관이 투표용지에 자신의 도장을 찍는 경우 도장의 날인은 인쇄날인으로 갈음할 수 있다’는 선거관리 규칙은 반드시 손봐야 한다. ‘인쇄날인’이라는 말은 ‘익힌 생고기’라는 말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문서를 특정하는 요소들로는 인장·서명·기명·기호가 있는데 기능과 역할이 같지 않다. 날인은 인장을 찍는 행위다. 그 결과로 남게 되는 인영(印影)이 문서를 특정해 주기도 하지만, 투표의 경우엔 ‘관리관’이라는 말이 보여주듯 ‘관리행위가 있었음’을 증명해 주는 기능도 한다.

관리는 그 자리에 그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더 본질적인 것이다. 인쇄날인은 인장이 아니고, 기호에 불과하다. 사전투표관리관이 없는 상태에서도 투표용지가 발급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고 있는 것이다.

관리행위가 있었음을 증명하지 못하는 한 투표소에서 나눠 주었다는 것만으로 그 투표용지가 유효하다고 할 수 없다. 아닌 말로 투표장에 아예 안 가는 사람들이나 못 갈 사람들의 데이터를 확보해 농간을 부려도, 밝혀내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렇게 하는데 많은 인원이 동원될 필요도 없다. 굳이 음모론까지 가지 않더라도 선거의 생명은 투명성이고, 국민의 신뢰다. 선관위가 사전투표를 날로 먹겠다는 심보가 아니고서는 ‘인쇄날인’이라는 궤변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최근 대만 선거의 투·개표 과정을 부러운 눈으로 봐야 하는 대한민국이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독일은 투표소들 중 일부만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권행사의 시점이 달라서는 안 된다며 모든 투표를 무효화했다. 우리 국민은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 살 자격이 없는 걸까. 부럽기보다는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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