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선
이호선

이맘때쯤 광화문 사거리를 걷다 보면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2월 11일은 조선말 개화정치가 김홍집이 광화문 앞에서 참혹하게 피살된 지 128주기 되는 날이다.

일본을 배경으로 개혁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그를 친일파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권력 다툼과 자리보전에만 유능했지 그 밖에는 전혀 무력했던 군주, 이리저리 잘도 넘어가는 무지한 백성들, 이권과 축재에 여념이 없었던 부패한 탐관오리들, 경복궁을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앞에 놓고 총리대신이 된 그에게 선택의 여지란 없었다.

그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슬그머니 빠져나간 고종이 자신에게 포살령(捕殺令)을 내렸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피신하라는 유길준의 권고를 뿌리치며 "나는 조선의 총리대신이다. 내가 조선인을 위해서 죽는 것은 천명일 것이다. 타국인들 손에 의해 구출되는 것은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라며 광화문 사거리에서 의연히 죽음을 맞이했다.

김홍집이 34살의 나이로 흥양(지금의 전라도 고흥일대) 현감으로 있을 때였다. 극심한 가뭄이 닥치자 그는 주월산에서 기우제를 지내면서 하늘에 이렇게 고했다고 한다. "비는 내리지 않고, 불과 같은 햇볕이 연일 내려 쪼여 백리의 땅이 불타고 있습니다. 고요히 그 허물을 생각해 보면 태수된 이 몸에 있습니다. 정치에 잘못이 많아서 하늘이 분노하신 것입니다…밝게 통촉하시고 벌은 이 몸에 내리셔서 뭇사람으로 하여금 재앙을 당하지 않도록 하옵소서." 20년 후 자신이 미완의 개화 희생양으로 하늘에 바쳐질 것을 예감이라도 한 것일까.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김홍집은 비록 일본과 적당히 지내자고 하여, 대쪽 같은 여론에 비춰보면 죄가 되겠으나 나라일에 신명을 다 바쳤고, 그 역량과 지략은 다른 사람들이 따를 바 못되었으니, 그의 죽음을 모두 애석해 하였다"고 평했다. 박은식 역시 <한국통사>(1915)에서 "난세를 구제할 만한 재주가 있다는 말을 듣던 사람이었는데, 그가 없으니 이제 개화할 사람이 없다고 모두 탄식한다"고 했다.

개화(開化)는 ‘만물의 뜻을 궁구하여 일을 성취한다’는 뜻의 역경(易經) 계사전(繫辭傳)의 개물성무(開物成務)와,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이룬다’는 예기(禮記) 학기(學記)에 나오는 화민성속(化民成俗)의 앞글자를 따온 것이다. 이는 개화가 어느 한 시대를 풍미했다가 사라진, 박제된 용어가 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김홍집은 광장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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