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택 성균관대 교수 '시인의 발견, 윤동주' 출간

중국 길림성에 있는 ‘윤동주 교실’. 이 지역은 윤동주에게 고향이자, 국제법이나 국경·국가의 개념을 넘어선 독자적인 영토였다. 그를 ‘민족·저항 시인’의 틀에 가두기 어려운 기본 배경이다. 또한 간도·조선·일본을 넘나드는 복잡한 신분과 내면은 ‘조선어’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운명을 미학적·이념적으로 완성하는 길(시인이 되는 것)을 향하게 만들었다. /김석구 기자

16일은 시인 윤동주(1917∼1945)의 77번째 기일이었다. 한국인의 애송시에 ‘서시’ ‘참회록’ ‘별 헤는 밤’ 등이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윤동주를 ‘민족시인·저항시인’이라 부르지만, 일본에선 ‘서정시인’ 중국에선 ‘조선족 시인’으로 분류된다. 북간도의 함경도 이주민 후손 집안에서 태어나 고향과 조선·일본에서 공부했고, ‘불령선인’(不逞鮮人:불온·불량 조선인)으로 검거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28년을 살다 간 윤동주는 한국인의 가슴에 영원한 청년 시인·독립운동가로 남았다. 그런 그를 ‘민족’이라는 좁은 틀에서 해방시키자는 학술적 주장이 나왔다. ‘저항시인 윤동주’ 대신, 동아시아 각지를 넘나든 청년 윤동주의 깊숙한 내면을 탐색한 책 <시인의 발견, 윤동주>다. 저자 정우택 성균관대 교수는 윤동주의 삶 가운데 이질성과 혼종성에 주목했다.

‘조선의 저항시인’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엔 생애나 문학세계가 매우 복잡하다는 것이다. 윤동주는 중화민국기 간도에서 출생해 조선인 마을의 소학교를 다녔으며 조선이나 한국 국적을 가져본 적이 없다. "여러 다른 시공간을 획득하려는 역사적 의지들의 각축 현장에서 성장하고 시를 썼다." 조선인 이주 4세로서 중화민국·만주국·일본·조선을 살 수밖에 없었던 윤동주를 일국적(一國的) 차원으로 바라보지 말자고 정 교수는 제안한다.

불의와 고난의 시대를 죽음으로 통과한 윤동주의 삶과 시가 1960년 4.19의 표상이 되는 등, 그의 삶과 문학을 ‘순결성’ ‘도덕성’ ‘독창성’과 ‘예외적 존재’로 이미지화 하는 것은 시대와 사람들의 의지로 ‘상상’된 결과 아닌가 질문을 던진다. 아울러 ‘조선어’로 자신의 존재와 운명을 미학적·이념적으로 완성하는 길, 그게 ‘시인’이 되는 것이라고 여겼다는 지적 또한 핵심을 찌른다. "윤동주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조선어만을 ‘우리말’로 세우고 갈고 닦아 ‘시’라는 개성 있고 고유한 문화 양식을 만들었다." 자기 존립의 필수 요건이 ‘조선어’였으며 "조선어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했다"는 것이다(제8장 ‘시’라는 망명정부).

윤동주를 중국 조선족으로 간주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엇나간 처사인지 말해준다. 정 교수에 따르면, 윤동주는 모순·억압·차이의 한복판에서 치열한 정치사상적 고투를 했다. 그의 삶과 문학엔 불온·혼종, 저항·탈주, 청춘·욕망이 점철돼 있다. 자기 삶과 시대가 발현하는 존재의 진리를 시로 담아내려고 분투했던 것이다.

윤동주에게 북간도는 국제법이나 국경·국가의 개념을 넘어선 독자적인 영토였다. 간도 이주민 3~4세대에게 ‘디아스포라 의식’을 적용해 일반화하는 것, 재만 조선인 윤동주의 삶과 의식을 결핍·상실·유랑 등 수난과 저항의 서사에 초점을 맞추는 것 역시 사실과 거리가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제1장 북간도).

‘한국인의 애송시 1순위 윤동주’는 앞으로도 달라질 것 같지 않다. 고독한 단독자로서 근대적 개인이 느끼는 소외와 외로움, 불안과 두려움, 분열적 내면을 직시하면서, 그 분열을 ‘별’이라는 유기적 상징체계로 감싸는 윤동주의 시에서 독자들은 고유한 자신의 존재를 돌아보고 안정감과 위안을 얻는다(제2장 별의 시인).

윤동주의 내면은 ‘백합’처럼 순결한 부분도 있지만, 불온과 열정을 내포한 ‘장미’의 에너지도 공존한다. 백합과 장미, 윤리와 욕망 사이에서 움직이고 있는 존재였으며, 그 사이의 갈등과 고뇌를 시로 썼던 것이다(제3장 불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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