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천
이주천

소설가이며 독립운동가인 홍명희(1888-1968)는 최남선·이광수와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일컬어진다. 소설 <임꺽정>의 저자로 민족문학가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홍명희는 해방정국에서 노골적으로 색깔을 드러내 좌익친탁운동을 했다. 1948년 4월 김구·김규식과 더불어 평양에서 열린 제정당시민단체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평양에 눌러앉아 숙청의 피바람을 피해 승승장구한 처세의 달인이었다. 북조선 초기 남북협상과 대남공작에서 공적이 대단했던 공산주의자였다.

홍명희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했으나, 경술국치 때 관료였던 부친 홍범식의 자결소식을 듣고 유학을 포기한 채 귀국했다. 이후 항일운동에 주력했고 3·1만세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는 춘원 이광수를 만나 톨스토이 작품을 읽어볼 것을 권유하는 등 항일독립운동가와 교분을 넓혔다.

항일 독립운동으로 몇 차례 옥고를 치르면서도 홍명희는 동아일보 편집국장과 시대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아들 홍기문의 회고에 의하면,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한다고 원서를 읽었고, 일본인 공산주의자들의 책을 읽었다. 1920년대 중반에는 조선 공산당 비밀 당원이었다가 출당 조치를 당하기도 했다. 홍명희는 적극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공산주의를 지지했던 것은 분명하다.

홍명희는 1928년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발표하면서 주목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그러다 1941년 임전대책협의회, 1945년 언론보국회에 참여해 해방 후 친일파 논쟁에 휩싸였다.

1945년 8월 이후 해방정국에서 홍명희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반탁운동에 참가했으나, 박헌영과 더불어 찬탁으로 돌변했다. 여운형의 암살 이후 근로인민당 당수가 됐으나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김일성이 홍명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계기는 그가 1945년 12월 김일성·무정(武丁·본명 김병희) 두 사람의 입경(入京) 환영준비 위원장을 맡았던 때였다. 그들의 입경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김일성은 남한의 좌익계 인사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중도좌파에 속한 홍명희는 1946년 봄 북한공산당에 포섭됐다. 1946년 3월말과 8월에 두 차례 비밀리에 방북, 김일성 등 지도급 인사들을 만났고 이들의 요청에 응해 남한에서의 공작활동을 했다. 그의 비밀 방북에는 일찍부터 공산주의자가 된 아들 홍기문의 역할이 있었다. 홍명희는 1947년 11월 중순 세 번째로 방북했고, 돌아온 이후로 남한 단독 총선 반대와 남북협상 성사를 위해 적극 노력해 김일성의 환심을 샀다. 1948년 2월에도 극비리에 북한을 다녀왔다.

제정당시민단체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평양에 남았던 홍명희는 1948년 9월 9일 북조선인민공화국이 건국되자 부수상이 됐다. 1949년 3월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을 수행했다. 당시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 동행한 홍명희도 당연히 김일성의 남침 계획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이듬해 초 남침을 승인했고, 홍명희는 남침 준비 전쟁 지휘부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7인군 사위원회’ 위원이었다. 6·25 전범 중 한 사람인 것이다.

1949년 9월 부인 김정숙이 죽자 김일성은 1950년 1월 홍명희의 딸 홍영숙과 재혼한다. 홍명희는 부수상에 임명되자마자 감읍해 쌍둥이 딸 둘을 김일성 관저에 가정부로 들여보냈다. 그 중 한 명이 김일성과 결혼한 것이다. 그후 김일성과 홍명희는 상당한 유착관계를 유지했다. 대부분의 월북 문인들이 숙청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홍명희만 승승장구했다. 홍명희 아들과 비서가 남파돼 간첩활동을 하다 체포된 적이 있기에, 그는 대남공작에도 적극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혹시 차후에라도 홍명희에 대해 항일운동을 했으니 건국훈장 수여하자는 말은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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