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천
이주천

최근 다큐 영화 ‘건국전쟁’이 관람객 100만 명을 돌파하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 그 영화를 본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이승만 대통령의 2대 업적을 농지개혁과 한미동맹 체결로 꼽았다. 이 대통령의 한미동맹 체결 업적은 널리 알려졌지만, 농지개혁은 특히 젊은 층에게는 생소한 것이다. 농지개혁은 1950년 4월 6·25 직전에 마무리된 토지개혁이다. 그 농지개혁을 주도한 주인공이 조봉암 당시 농림부장관이다.

북한은 이미 1946년 6월에 토지개혁이 마무리된 상태였다. 6·25 때 북한군이 농민들을 공산당 쪽으로 포섭하려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던 것은, 농민들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조봉암은 일제 하에서는 박헌영처럼 열렬한 항일공산주의자였다. 모스크바동방노력자공산대학을 2년 수료했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자 조직중앙위원장을 지냈으며, 고려공산청년회의 간부가 됐다. 이후 소련·중국·만주·국내 등을 오가며 항일공산주의 운동을 했다. 1927년에는 민족유일당 운동을 추진했다.

조봉암은 노농총연맹조선총동맹을 조직하고, 상하이로 가서 코민테른 원동부 한국인 대표에 임명된 후 ML당을 조직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송환, 7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에는 인천에서 지하 노동단체를 조직해 활동했고 이 때문에 1945년 1월 다시 검거됐다.

해방 직후 석방된 조봉암은 조선공산당, 건국준비위원회, 민족주의 민주전선 등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46년 5월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는 공개서한을 보낸 뒤 강제 출당을 당했다. 그 뒤 사상을 전향,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해 남북협상노선을 걷다가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조봉암은 1948년 7월 국회 헌법기초위원장으로 헌법 제정에 참여했다. 이후 제1대 농림부 장관에 취임했고, 재직 당시 지주들에게 예속된 농지들을 유상몰수 유상분배 원칙으로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농지개혁의 기틀을 마련했다.

1952년 조봉암은 제2대 대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으나 1956년 제3대 대선에 출마해 30% 지지율을 얻어 파란을 일으켰다. 그해 11월 진보당을 창당, 이승만의 라이벌로 부상했다. 그러나 1958년 상인 양명산을 통해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며 1959년 교수형을 당했다.

87체제 이후 역사가들을 조봉암을 사회민주주의자로 규정하면서 그의 처형을 ‘사법살인’이라 주장했다.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에서 조봉암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복권됐다. 그러나 9년 뒤 <주간조선>은 "북한 김일성 주석이 남한 대선에 개입했다고 실토한 구(舊)소련 외교문서가 발견됐다"고 단독 보도했다(‘52년 만에 공개된 김일성의 고백’ 2020.5.19).

이것은 1968년 9월 당시 김일성이 북한을 방문한 드미트리 폴란스키(1917~2001) 소련공산당 정치국원 겸 내각 부의장에게 "1956년 남한 대선에 개입했다"고 밝힌 문서다. 이 문서는 1956년 3대 대선 때 출마한 조봉암이 북측에 조언을 요청했고, 이를 전달받은 북한이 노동당 정치국 회의를 소집해 진보당 설립과 조봉암 후보를 지원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김일성은 기록에서 "이 동무(조봉암)는 배신자가 돼서 이승만에게 넘어간 것이 아니었다. 조봉암은 확고한 공산주의자로 남았다. 공산주의자로 남았던 조봉암은 ‘이승만 편에 살아남고 조국의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하기 위하여 넘어갔다’는 편지를 우리에게 보냈다"고 소련 측에 밝혔다. 이 문서 발견으로 조봉암은 평생 공산주의자였으며 그의 전향은 위장이었다는 논란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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