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상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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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증시의 끝 모를 추락으로 촉발된 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 투자손실 사태로 수 많은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막대한 배상 책임을 떠안게 된 은행권도 ‘ELS 포비아’에 빠졌다는 말이 나온다. 금융당국의 칼날에 KB국민은행, 신한은행, 하나은행, NH농협은행은 이미 ELS 상품 판매를 전면 중단한 상태다.

원칙적으로 투자 결과는 투자자 자신의 책임이다. 손실을 보더라도 투자를 중개한 금융기관에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이를 ‘투자자 자기책임의 원칙’이라고 한다. 하지만 홍콩H지수 ELS 사태로 은행권은 또다시 불완전판매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다. 서민들에 대한 금융투자상품의 문턱을 낮추며 재테크 도우미 역할을 했지만 대규모 투자손실이 발생할 경우에는 어김없이 ‘공공의 적’으로 내몰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홍콩H지수 ELS 사태가 금융투자상품 판매 중단 등으로 이어질 경우 서민들의 재테크 수단이 막혀버릴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채 자금이 쌓이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지난달 말 기준 5대 은행의 요구불예금 잔액은 614조2656억원으로 전월 말보다 3.99%인 23조5536억원 불어났다. 수시입출금식예금이라고도 불리는 요구불예금은 일반 예금에 비해 금리는 낮지만 언제든 입출금이 가능해 투자 대기성 자금으로 분류된다.

1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국내 은행들이 금융투자상품 판매에 본격 나선 것은 약 20년 전인 2004년 무렵이다. 재테크라고 하면 부동산, 주식, 예금 등 직접투자 밖에 몰랐던 당시 서민들에게 간접투자 방식의 금융투자상품은 미지의 세계였지만 ‘은행은 믿을 만한 곳’이라는 인식으로 증권사보다 거부 반응이 덜했다.

경제가 저성장기에 접어들면서 은행권 역시 이자장사를 넘어 금융투자상품 판매를 통한 수수료 확대를 새로운 수익모델로 잡았다. 이 같은 과정을 통해 2000년대 중반 공모펀드 붐이 일었고, 2010년대에는 ELS가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재테크 열풍이 분 뒤에는 금융 사이클상 폭락 사태와 함께 투자손실에 따른 트라우마를 남겼다. 그 때마다 불완전판매 이슈가 제기됐고, 금융투자상품도 설자리를 잃게 됐다.

이번에는 홍콩H지수 ELS 사태가 터졌다. 4.10 총선을 앞두고 금융소비자 피해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마주한 금융당국의 어깨도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김주현 금융위원장은 지난 1월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은행이 ELS 판매를 중단해야 한다는 주장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며 "ELS뿐만 아니라 금융투자상품은 모두 위험한 만큼 종합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이 같은 발언은 투자와 투기의 경계를 애매모호하게 만들면서 혼란을 부추겼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이번 홍콩H지수 ELS 사태를 계기로 금융당국이 금융투자상품 판매를 전면 금지할 수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이는 금융소비자의 선택권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는 만큼 실현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 지배적인 관측이다. 금융투자업계의 한 관계자는 "은행마저 금융투자상품을 팔지 않으면 금융 취약층은 아예 재테크 기회가 없을 것"이라며 "서민들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액자산가는 전담 프라이빗 뱅커(PB)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서민들은 ‘깜깜이 투자’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다만 이번 홍콩H지수 ELS 사태로 은행권의 금융투자상품 판매에 대한 제도개선 작업이 본격화될 것으로 보인다. 홍콩H지수 ELS 판매사에 대한 현장검사 결과 적합성 원칙, 설명의무 위반, 대리 가입, 고령자 보호 소홀 등 다양한 불완전판매 사례가 확인됐기 때문이다.

금융권에서는 판매사에게 과도한 책임을 돌리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반응이다. 금융권의 한 관계자는 "5년 이상의 긴 주기로 인해 예상하지 못한 폭락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시장의 이치"라며 "ELS의 경우에는 구조가 명확한 금융투자상품인데, 투자자의 자기책임 원칙보다 판매사의 불완전판매가 특히 강조되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아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고령자를 포함한 은행 이용자의 다수가 ‘은행에서는 원금보장 상품을 판매할 것’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다. 이 때문에 금융투자상품을 판매할 때는 더욱 촘촘하게 상품에 대한 설명이 이뤄져야 하는데, 홍콩H지수 ELS의 경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금융당국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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