⑮ 갑자기 미국으로 간 이유

스크랜튼이 세운 상동(尙洞)교회
상동교회의 청년 지도자 전덕기
엡워스, 감리교 창립자 고향 지명
이승만, 고종의 밀사 요청 거절
민영환(총리)·한규설(부총리) 요청
‘유학’위한 선교사 추천서 19통 지참

류석춘
류석춘

"(190489) 출옥 후 당분간 휴식을 취하던 이승만은 19041015일 전덕기, 주상호(주시경), 박용만, 정순만 등 청년 동지들이 설립한 상동청년학원초대 교장으로 추대되어 기독교 교육운동에 투신했다. 그러다 갑자기 민영환·한규설의 비밀 부탁을 받고 미국행 배를 탔다. 1904114일이었다. 알 수 없는 미래로의 끝없는 항해가 시작되었다.”

이 연재물 13(202238) 마지막 문장이다. 57개월 감옥살이를 마치고 당대 최고의 청년 동지들과 의기투합해 기독교 교육운동 투신을 결심했던 이승만은 왜 3주 후 미국으로 가게 되었나? 이 대목을 설명하는데 조금씩 이견이 있어, 이번 기회에 정리해 본다.

우선 상동청년학원은 어떤 곳인가? 이승만은 신학월보190411월호에 기고한 상동청년회에 학교를 설치함이란 글에서 이 학교의 특징으로 1) 상동교회 앱워스청년회가 주축이 되어 만들었고, 2) 스크랜튼 목사가 떠난 후 전덕기가 중심이 되어 우리나라 사람끼리 하는 일이며, 3) 재주만 가르치지 않고 전인교육을 목표로 한다고 설명했다 (이정식, 2005: 231-245).

이승만이 1904년 미국으로 갈 때 사용한 여권 (집조, 執照). 오른쪽 아래 타원 속에 ‘경기(京畿)도 한성(漢城)부 이승만(李承晩)’ 이라 쓴 한문 손글씨, 그리고 왼쪽 위 타원 속에 ‘Lee Seung Mahn, KyungKi, Seoul’ 이라 쓴 영문 손글씨가 보인다. 출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국가기록원 국가지정기록물).
이승만이 1904년 미국으로 갈 때 사용한 여권 (집조, 執照). 오른쪽 아래 타원 속에 ‘경기(京畿)도 한성(漢城)부 이승만(李承晩)’ 이라 쓴 한문 손글씨, 그리고 왼쪽 위 타원 속에 ‘Lee Seung Mahn, KyungKi, Seoul’ 이라 쓴 영문 손글씨가 보인다. 출처: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국가기록원 국가지정기록물).

상동(尙洞)교회1888년 미국 의료선교사 스크랜튼 목사가 남대문에 세운 교회로 감리교 창립자 존 웨슬리 (John Wesley) 의 영국 고향 마을 엡워스 (Epworth) 지명을 딴 청년회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청년회는 1899년 해산된 독립협회1906년 창립한 비밀결사 신민회를 연결하는 반일운동의 중간다리 역할을 한 중요한 단체다.

이 교회는 1898년부터 교회의 속장(屬長) 및 청년회 회장을 역임한 전덕기 전도사를 중심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배재학당에 이어 서울의 두 번째 벽돌 건물을 1902년 지어 청년 활동의 본거지로 제공했다. 이 교회의 청년회가 지덕체’ (智德體)를 동시에 추구하는 전인교육을 목표로 세운 학교가 상동청년학교였다.

이승만을 교장으로 세울 때 청년회 회원의 숫자는 수 백명 수준으로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1905년 을사조약을 거치며 이 교회를 지원하던 감리교단은 일본의 침략을 비판하는 상동청년회 활동을 정교분리원칙에 어긋난 행동이라 문제 삼으며 지원을 끊고 마침내 1906년 해산시켰다.

이 학교의 교장 자리는 감옥에서 갓 나온 이승만으로서 마다할 이유가 없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교장 취임 후 3주 만에 미국행 배를 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연구자들 사이에서 조금씩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고종의 밀사였다는 설, 고위 관료 민영환·한규설의 밀사였다는 설, 그리고 미국 유학때문이라는 설 등이다.

고종 밀사설과 민영환·한규설 밀사설은 다음과 같이 서로 뒤엉켜 전개된 일련의 사건을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강조해 나타난 결과로 보인다. 이 두 설은 이승만 본인의 글을 통해 다음과 같이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정식이 2005년 출판한 책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배재대학교 출판부) 에 한글로 번역된 이승만의 영문 자서전이 전하는 대목이다 (313).

어느 날 아침 외출했다 집에 돌아왔을 때 궁중에서 온 시녀 한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폐하께서 나를 단독으로 만나보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황제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그에 대해서 평소에 품고 있던 모든 쓰라린 증오감이 북받쳐 올라와 즉석에서 폐하와 사적 알현을 하고 싶은 의사가 전혀 없다고 단언해 버렸다...

[후에] 알고 본즉 민공(閔公)과 한()장군이 황제에게 나를 불러다가 황제의 밀사로 미국에 보내 1882년에 체결한 조미수호조약에 약속한 대로 도움을 요청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고종은 그 조치에는 찬동했으나 민공과 한장군을 믿을 수가 없어 나를 비밀리에 불러다가 금전 얼마와 사신(私信)을 주어 보내려고 했던 것이었다. 나는 황제의 초빙을 거절함으로써 얼마나 좋은 기회를 잃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와 접촉하기를 거부한 데 대해서 후회해본 일은 없다

이승만은 고종을 “4,200년 동안 내려온 군주들 가운데서 가장 허약하고 겁쟁이 임금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정식, 2005: 255). 이런 이유로 고종은 이승만을 개인 사절로 파견하는데 실패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0510월 고종은 헐버트 (Homer B, Hulbert) 목사에게 친서를 맡겨 미국으로 보냈다 (Oliver 1955: 73-75).

미국 유학설은 이주영 교수의 책 이승만과 그의 시대(기파랑, 2011) 36쪽에 등장한다. “개화파 정치인인 민영환과 한규설은 유학을 떠나는 이승만을 통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해 볼 생각이었다.” 이주영 교수는 이승만이 어차피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되어 있었고, 그 인편을 이용해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자는 민영환과 한규설의 제안에 이승만이 동의한 결과라고 설명하는 셈이다.

이승만의 미국 유학에 방점을 찍는 이 설명은 다음 두 가지 사실로 더욱 뒷받침된다. 하나는 이승만이 선교사들로부터 19통이나 되는 추천서를 가방에 넣고 미국으로 떠났다는 사실이고 (이정식 2005: 256), 다른 하나는 그보다 일찍 이승만은 감옥에서 유학생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자리들이란 메모도 남겼다는 사실이다 (유영익, 2002: 399).

유학과 밀사라는 두 가지 과업 중 이승만에게 무엇이 더 중요한 일이었는지 분명히 판단할 객관적 근거는 없다. 이승만에게는 둘 모두가 중요한 과업이었을 수 있다. 배재학당 시절부터 선교사들의 충고를 가슴에 품은 이승만은 미국 유학을 언젠가는 꼭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마침 민영환과 한규설의 구체적인 요청을 받자 그들의 서신을 품고 미국으로 떠났다고 정리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민영환(왼쪽)과 한규설.
민영환(왼쪽)과 한규설.

그렇다면 이승만으로 하여금 상동청년학교 교장 자리를 그만두게 하고 미국으로 떠나게 한 민영환과 한규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민영환은 이승만의 자서전에 미국으로 떠날 당시 영의정(총리)이라 기술되어 있는 인물이다 (이정식 2005: 313). 한규설은 감옥에 있던 이승만이 189912월 징역 10년으로 감형될 때 법부대신이었고 (강준만 2007: 88), 이승만이 출국하던 당시를 전후해서는 참정대신(부총리) 이었다. 이들은 당시 독립협회 등 개화파를 지원하던 관료세력의 대표적 인물들이었다.

이승만보다 14살 위인 민영환(1861~1905)187817살에 병과에 급제한 이후 고종의 처가인 민씨 일가의 후광을 입으며 출세의 길을 달렸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한 그는 1882년 임오군란 후유증으로 사직했으나, 1884년 이조참의로 복귀해 병조판서, 형조판서, 한성부윤(서울시장) 등을 거치며 승승장구했고 1895년 주미전권공사로 임명되었으나 을미사변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사직했다.

1896년에는 러시아 그리고 1897년에는 유럽 6개국 특명전권공사로 견문을 넓힌 후 탁지부(재무부) 대신 등도 역임했지만, 황국협회로부터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옹호한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당했다. 1904년 러일전쟁 전후로 의정부(내각) 참정대신(부총리), 내부대신, 학부대신 등으로 복직했으며 의정부 의정대신(총리) 서리로도 일했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내정간섭에 항의하다 시종무관(侍從武官, 황제직속부대)으로 좌천당한 끝에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하고 19051145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한규설(1856~1930)은 이승만보다 19살 위의 인물로 188426살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해 형조판서, 한성판윤, 포도대장 등을 지낸 무관 겸 정치인이다. 1905년 참정대신(부총리)으로 을사조약을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가 남작 작위를 수여했으나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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