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


엎드려 있었다지, 온 생애를 그렇게

단풍 차린 잎들이 떨어지며
는실난실 휘감겨와도
그 잎들 밤새 뒤척이며 속삭였건만
마른풀들 서로 몸 비비며
바람 속으로 함께 가자 하여도
제 그림자만 꾹 움켜잡고
엎드려만 있었다지.

설움도 외로움도 오래되면 둥글어지는 걸까
제 속 가득 씨앗들 저리 묻어두고
밤낮으로 그놈들 등 두드리며
이름도 없이, 주소도 없이
둥글게 말라가고 있었다지.

늙은 호박을 잡아
그 둥글고 환한 속을 본다
사리처럼 박힌
단단한 그리움.


이승희(1965~ )

 

/게티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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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생긴 여자의 호박 비유는 재고되어야 한다. 호박은 못생기지 않았다. 단지 흔해서 주목을 끌지 못할 뿐이다. 호박은 둥글다. 그러고 보니 모든 열매는 둥글다. 생각해보면 새싹부터 비바람을 잘 견뎠기 때문에 그런 모습이 된 건 아닐까. 어쨌거나 잘 익은 호박은 부기를 빼고 노화를 예방한다.

이승희 시인의 ‘호박’은 홀로 자식을 키운 어머니의 상징이다. ‘온 생애를 엎드려만 있었다’는 것은 온갖 시련을 견디고 겸손하게 살았다는 뜻이다. 청상과부였기에 유혹도 많았다. ‘마른풀들 서로 몸 비비며 바람 속으로 함께 가자 하여도’ ‘단풍 차린 잎들이 떨어지며 는실난실 휘감아도’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팔자를 고치지 않았다.

그렇듯 ‘설움과 외로움’을 달래며 ‘자식들 등 두드리며 이름도 없이 사느라’ 정작 자신의 몸은 ‘둥글게 말라가고 있었다.’ ‘늙은 호박을 잡아 그 둥글고 환한 속’을 보면 ‘사리처럼 박힌’ 씨가 있다. 그것은 ‘단단한 그리움’으로 오랜 인고의 세월이 만든 결정체다. 그리하여 그 씨는 또다시 수많은 호박을 키운다. 인류가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고 예까지 온 것은 순전히 모성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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