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나는 법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내일은 언제 오나요하룻밤만 자면 내일이지다음 날 다시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오늘이 내일인가요아니란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또 하룻밤 더 자야 한단다고향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어머니 임종의 이마에둘러앉아 있는 어제의 것들이 물었습니다얘야 내일까지 갈 수 있을까그럼요 하룻밤만 지나면 내일인 걸요어제의 것들은 물도 들고 간신히 기운도 차렸습니다다음 날 어머니의 베갯모에수실로 뜨인 학 한 마리가 날아오르며 다시 물었습니다오늘이 내일이지아니에요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하룻밤을 지내야 해요이제 더 이상
그릇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절제(節制)와 균형(均衡)의 중심에서빗나간 힘,부서진 원은 모를 세우고이성(理性)의 차가운눈을 뜨게 한다.맹목(盲目)의 사랑을 노리는사금파리여,지금 나는 맨발이다.베어지기를 기다리는살이다.상처 깊숙이서 성숙하는 혼(魂)깨진 그릇은칼날이 된다.무엇이나 깨진 것은칼이 된다.오세영(1942~ ) ☞이 시는 일상적 사물에 상징적 의미를 담아 관념적 세계를 형상화한 것으로, ‘깨진 그릇’을 통해 삶의 의미와 실존적 고뇌를 성찰했다. ‘깨진 그릇’은 ‘사금파리’가 되어 칼날로 변하지만 종당엔 ‘이성의 차가운 눈’을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반갑게 악수를 나누고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저마다 목청껏 불렀다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겨울밤 하늘로 올라가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그로부터 18년 오랜만
모래 모래는 작지만 모두가 고집 센 한 알이다그러나 한 알만의 모래는 없다한 알 한 알이 무수하게 모여서 모래다오죽이나 외로워 그랬을까 하고 보면웬걸 모여서는 서로가모른 체 등을 돌리고 있는 모래모래를 서로 손잡게 하려고신이 모래밭에 하루 종일 봄비를 뿌린다하지만 뿌리면 뿌리는 그대로모래 밑으로 모조리 새나가 버리는 봄비자비로운 신은 또 민들레 꽃씨를모래밭에 한 옴큼 날려 보낸다싹트는 법이 없다더 이상은 손을 쓸 도리가 없군구제불능이야신은 드디어 포기를 결정한다신의 눈 밖에 난 영원한 갈증!이형기(1933~ )☞‘모래는 작지만 모두
해당화당신은 해당화 피기 전에 오신다고 하였습니다.봄은 벌써 늦었습니다.봄이 오기 전에는 어서 오기를 바랐더니,봄이 오고 보니 너무 일찍 왔나 두려워합니다.철모르는 아해들은 뒷동산에 해당화가 피었다고,다투어 말하기로 듣고도 못들은 체 하였더니,야속한 봄바람은 나는 꽃을 불어서 경대 위에 놓입니다그려.시름없이 꽃을 주워서 입술에 대이고,"너는 언제 피었니"하고 물었습니다.꽃은 말도 없이 나의 눈물에 비쳐서,둘도 되고 셋도 됩니다.한용운(1879~1944) ☞‘해당화’는 늦봄부터 피기 시작하여 한여름에 만개했다가 늦더위 때 열매를 맺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옹졸하게 욕을 하고한 번 정정당당하게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비겁한 것이라고
적정 온도 주민센터에 왔어요창구에서 나를 응대해준 공무원은친절하지 않았지만무례하지도 않았습니다대기표를 들고 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내내그들의 첫인사와 끝인사는 엇비슷했습니다안녕하세요, 안녕히 가세요똑같은 표정과 말투로 서류를 건네고다음 번호를 부르죠전문기구가 권장하는 겨울철 적정 온도는 이십도겨울이면 이곳은 항상 적정 온도를 유지합니다평온하다는 것, 지금 내 몸이 식어 있지도뜨겁지도 않다는 것손을 잡아도 느낄 수 없을 만큼투명한 체온이라는 것(……)용무를 끝내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서주민센터를 나왔습니다바깥은 공기가 찼지만 바람은 불지
먼 풍경 수백 년을 살아온 나무는제 몸의 가지가 어디로 뻗을지 알지 못한다수천 년을 흐르는 강 또한물길이 어디로 나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가지가 어디로 뻗든물길이 어디로 나든그것은 중요하지 않다가지마다 초록이 오르고 꽃이 만개하고물길 닿는 곳마다 생명이 움트는나무와 강이 품고 빚어내는먼 풍경이 아름다운 것이다나도 내가 어떻게 뻗어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하여 그것들이 빚어낼 훗날의 풍경 또한서둘러 예단하지 않으련다곽효환(1967~ ) ☞살다보면 가끔 자기 자신과 타인의 미래를 ‘예단’할 때가 있다. 어떤 사람은 운명론에 기대어 그
부활절 아침의 기도 주여저에게이름을 주옵소서.당신의부르심을 입어저도 무엇이 되고 싶습니다.주여주여주여태어나기 전의이 혼돈과 어둠의 세계에서새로운 탄생의빛을 보게 하시고진실로 혼매한 심령에눈동자를 베풀어 주십시오.‘나’라는이 완고한 돌문을열리게 하옵시고당신의 음성이불길이 되어저를 태워 주십시오.그리하여바람과 동굴의저의 입에신앙의 신선한열매를 물리게 하옵시고당신의부르심을 입어저도무엇이 되고 싶습니다.주여간절한새벽의 기도를 들으시고저에게 이름을 주옵소서.박목월(1915~1978)☞정지용 시인은 ‘문장’지에 목월을 추천하면서 북에 소월이
水仙花 一點冬心朶朶圓(한 점 겨울이 송이송이 동그랗게 피어나더니)品於幽澹冷雋邊(그윽하고 담담한 기풍이 냉철하고도 빼어나구나)梅高猶未離庭체(매화는 고상하지만 뜰을 벗어나지 못하는데)靑水眞看解脫仙(맑은 물가에서 해탈한 신선을 보게 되는구나)김정희(金正喜; 1786~1856) ☞젊은 시절 추사(秋史)는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중국 연경에 갔다가 겨울에 피어난 수선화에 처음으로 매료되었다. 중년의 추사는 수선화를 잊지 못하고 당시 평안감사였던 부친이 가지고 있던 수선화를 자신에게 달라고 졸랐다. 김노경이 가지고 있던 수선화는 중국 사신으로부
백구야 놀라지 마라 백구(白鷗)야 놀라지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성상(聖上)이 버리시니 갈 곳 없어 예 왔노라이제는 찾을 이 없으니 너를 좇아 놀리라김천택(金天澤; 1680년대 말 ~ 미상) ☞시조시인 김천택의 신분에 관해서는 알려진 게 별로 없다. 당시 가객들이 대부분 그러했듯 그 역시 중인 계층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직은 젊었을 때 잠시 지낸 듯하고, 한평생을 자연 속에서 가객(歌客)으로 여생을 마쳤을 터이다.이 시는 임금에게 버림받은 신하가 자연으로 들어가 갈매기와 더불어 놀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백구(白鷗)는 진
봄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오오 봄이여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오오 인생이여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 인의 생활과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애타도록 마음에 서
엄마가 휴가를 나온다면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엄마가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아니 아니 아니 아니반나절 반 시간도 안 된다면단 5분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원이 없겠다.얼른 엄마 품속에 들어가엄마와 눈맞춤을 하고젖가슴을 만지고그리고 한 번만이라도엄마!하고 소리 내어 불러 보고숨겨 놓은 세상사 중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엉엉 울겠다.정채봉(1946~2001) ☞정채봉 작가 어머니는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정채봉을 낳고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아들은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할머니 손에
삼중당 문고 열다섯 살,하면 금세 떠오르는 삼중당 문고150원 했던 삼중당 문고수업시간에 선생님 몰래두터운 교과서 사이에 끼워 읽었던 삼중당 문고특히 수학시간마다 꺼내 읽은 아슬한 삼중당 문고위장병에 걸려 1년 간 휴학할 때암포젤 엠을 먹으며 읽은 삼중당 문고개미가 사과 껍질에 들러붙듯 천천히 핥아먹은 삼중당 문고(…)삼성전자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문홍서림에 일하며 읽은 삼중당 문고레코드점 차려놓고 사장이 되어 읽은 삼중당 문고고등학교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며 읽은 삼중당 문고고시공부 때려치우고 읽은 삼중당 문고시공부를 하면서 읽
질투는 나의 힘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기형도(1960~19
입춘단상 바람 잔 날무료히 양지쪽에 나앉아서한 방울두 방을슬레이트 지붕을 타고 녹아내리는추녀 물을 세어보다한 방울또 한 방울천 원짜리 한 장 없이용케도 겨울을 보냈구나흘러가는 물방울에봄이 잦아들었다.박형진(1958~ )☞우리조상들은 입춘(立春)에 좋은 뜻이 담긴 글귀를 집안 곳곳에 붙였다. 입춘축(立春祝) 또는 입춘첩(立春帖)이라 불리는 한지다. 축문은 주로 입춘대길(立春大吉), 국태민안(國泰民安), 건양다경(建陽多慶) 같은 문구를 즐겨 썼다. 입춘이 오면 세시풍속으로 여러 의례가 베풀어졌으나 근래에는 축문만 대문이나 문설주에 붙이
그리스도 폴의 강(江) 아침 강에안개가자욱 끼어 있다.피안(彼岸)을 저어 가듯태백(太白)의 허공 속을나룻배가 간다.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까치가 한 마리요란을 떨며 날은다.물밑의 모래가여인네의 속살처럼맑아 온다.잔 고기떼들이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노닌다.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꿈결의 꽃밭을 이룬다.나도 이 속에선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구상(1919~2004) ☞구상 시인은 강(江)의 시인이었다. 강을 보기 위해 여의도 아파트로 이사한 시인은 베란다에 안락의자를 갖다놓고 한강을 바라보며 시심(詩心)을 가다듬었다. 당호(堂號
쉽게 쓰여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은 남의 나라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를 적어볼까.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대학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나는 무엇을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육첩방은 남의 나라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물 어디 있어도 위안이 되나니물 서늘한 물이여녹슨 수도관을 타고 더러운 꼭지 아래로쏟아지는 물, 물줄기그 아래서 더운 손을 내밀면한숨 쉬지 말라한다 고집하지 말라한다물 서늘한 물다 깨진 유리창 그 너머 줄친거미가 속삭인다 몸 맡겨봐저 바람에 몸 맡겨봐자유롭게 헤엄쳐 보라 한다물에 손 담그고느껴보라 한다이대해(1962~ ) ☞시의 탄생에 대한 추리는 흥미롭다. 무더운 어느 여름날 시인은 우연히 폐교(廢校) 혹은 폐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터이다. 건물은 ‘유리창이 다 깨어지고’ ‘거미가 줄을 치고’ 잡초 무성한 운동장은 을씨년스러웠을 터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나타샤를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나타샤와 나는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눈은 푹푹 나리고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눈은 푹푹 나리고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