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 음악극 '1919 필라델피아' 앵콜 공연에 담긴 의미

한국근대사의 역사적인 집회, 독립운동 美 전역 확산 계기
이승만 '필라델피라의 정신'을 임시정부 등에서 구현 노력

 
1919년 4월16일 서재필 이승만 등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참석자들이 시가행진을 마치고 독립기념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서재필기념재단 제공

다큐 음악극 ‘1919 필라델피아’는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100주년 기념공연 ‘길 위의 나라’ 제작총괄을 맡았던 국민대 이혜경 교수의 대본 작업으로 시작됐다.

이 교수는 "당시의 대회 회의록에도 나와 있듯 기독교정신과 자유민주주의가 대한민국의 기초다", "MZ세대에게 기독교적 세계관과 역사를 흥미롭게 제시하기 위해 공연을 준비했다"고 밝혔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건국과 독립의 스토리를 자랑스러운 민족 서사로 만들어냈다", "반면 한국에선 과거 역사로 편가르기 하기 바쁘다. 교회가 역사적 상상력을 갖고 민주주의와 선교 국가의 비전을 민족의 대서사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이 교수의 말이다.

1919년 4월 필라델피아 한인대회가 열리고, 또 100여년 만에 음악극으로 재현될 수 있었던 배경엔 기막힌 ‘역사적 인연’들이 작용했다. 이승만에게 대회 개최를 권유하고 대회 회의록과 결의안, ‘미국인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등을 세계적 통신사인 AP·UP에 제공한 인물이 조지 베네딕트였다.

총 21개 챕터로 된 자신의 회고록(Christ finds a rabbi) 제11장에서 한국독립운동 내용을 다루고 있다. 베네딕트는 유대인 랍비가문 출신이지만 신약성경과 기독교에 관심을 가졌다. 1910년 유럽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이래 기독교 인사들과 많은 친분을 쌓았고, 자연스레 훗날의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만나게 된다.

이 박사로부터 일본의 만행과 관련 사진을 접한 후 "내 삶에 혁명이 일어났다"고 베네딕트는 표현했다. 그가 3·1운동을 처음 만난 것은 1919년 3월 마지막 주, 필라델피아 16번가의 한 문방구에 물건을 사러 들어갔을 때의 일이다(마침 서재필 박사의 가게였다). 흥분된 채 눈물을 흘리며 얘기 나누는 두 남자를 보고, 중국인들인가 생각했으나 사정이 궁금해져 무슨 일인지 물었다.

제정 러시아 시절 유대인 학살 사건에 침묵하는 세계 강대국들에게 분노해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게 된 베네딕트는, 한반도에서 진행 중인 사태를 ‘미국 조야에 알리라’ 적극 권했다. ‘돈이 없다’ ‘돈 많은 일본 당국의 홍보기관들을 당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오자, "위대한 행동에 돈은 필요치 않다" "동포들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라"고 격려하며 나름의 역할로 돕는다.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배경의 한 지류(支流)다.

1919년 3월 1일부터 폭발한 뜨거운 함성이 열흘 안 돼 미국 땅에 닿았다. 독립운동가 현순 목사가 중국 상하이에서 소식을 듣고,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던 도산 안창호 선생에게 3월 9일 급히 전보를 쳤다.

미국 교민사회는 뜨거운 감동과 흥분에 휩싸인다. 그 결과 ‘제1차 한인회의’가 실현돼, 독립운동이 미 전역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필라델피아 한인대회 연구자 박명수 서울신학대 명예교는 "단순한 독립이 아니라, 우리가 꿈꾸는 나라를 가장 분명하고 자세하게 논의한 한국근대사의 역사적인 집회"로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필라델피아의 정신’을 이승만 안창호가 임시정부 등에서 구현하려 노력했으며, 그게 이어져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 교수의 말대로 이 필라델피아 한인대회는 ‘자유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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